나만의 돈세탁방지법
나만의 돈세탁방지법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2.12.27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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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아침 설거지를 끝내고 커피 한 잔 내려 TV 앞에 앉았다. 채널을 돌려보다 우연히 넷플릭스 영화를 한 편 보게 됐다. `서울대작전'이라는 제목의 돈세탁 관련 영화였다. 내용과 전개가 너무 뻔해서 대부분의 후기가 캐스팅이나 제작비 대비 형편없다는 혹평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세상의 부조리함을 꼬집어 펼쳐 보였다는 점에서 별점을 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나으니까. 후반부에 몇백억 되는 돈이 하늘 위에서 뿌려지는 장면에서는 솔직히 통쾌했다.

작년 가을쯤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종료음을 듣고 세탁기 문을 열었는데 빨래 전체가 온통 희끗희끗 난리가 나 있었다. 가끔 주머니를 확인하지 않고 빨래를 내놓는 남편 때문에 이런 경험이 몇 번 있었다. 그날따라 빨래 양도 많아서 빨래를 하나씩 털어 건조기에 넣는 동안 점점 남편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마지막 빨래를 꺼내고 바닥에서 익숙한 색 조합으로 뭉쳐진 잔해가 보이는 순간 느낌이 싸했다. 아뿔싸, 그건 내가 총무를 보고 있는 단체의 통장이었다. 전날 은행 갈 때 입었던 바지를 하루 더 입을까 어쩔까 하다가 막판에 급하게 세탁기에 넣었던 게 화근이었다.

그날 저녁에 남편이 좋아하는, 손 많이 가서 안 해줬던 김치만두를 빚었다. 죄없이 의심한 게 미안해서. 영문도 모르고 맛있게 먹은 남편은 그것으로 됐고, 문제는 빨아버린 협회 통장이었다. 다행히 기장 내용은 은행에 가서 뽑을 수가 있었는데 법인통장을 재발급받는 절차가 꽤 까다로웠다. 협회 통장이라는 확인만 된다면 쉬웠을 텐데 산산조각이 나는 바람에 증명할 서류들이 필요했다. 지부장님이 바쁜 시간을 쪼개 몇 번이나 은행을 들락거려야 했으므로 너무 죄송하고 마음이 괴로웠다. 그 며칠 동안은 마치 공금 횡령한 죄인처럼 지냈다. 그 후로 한동안은 만나는 사람마다 `돈세탁은 할 짓이 못 된다'며 우스갯소리 삼아 이야기하고 다녔었다.

요즘에는 주위에서 보이스피싱이나 사기, 돈세탁 등에 관한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오곤 한다. 내가 아는 사람도, 옛친구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와서는 사업하다 망했다, 신용불량자로 계좌가 막혀서 그러니 돈을 대신 받아달라, 약간의 사례도 하겠다고 사정사정하더란다. 처지가 하도 딱한 것 같아서 본인 계좌로 몇 번 돈을 받아 부탁받은 계좌로 송금을 해줬는데 나중에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다행히 법적 처벌은 면했지만, 어지간히 맘고생을 했던 듯하다. 법으로 금지하는데도 범죄가 끊이질 않는 건 왜일까? 그 근본적인 이유는 어쩌면 마음에 낀 욕심을 털어내지 못해서일지 모른다. 검은돈세탁의 유혹을 물리칠 방법은 결국 각자의 마음속 탐욕을 씻어내는 마음세탁에 있을 것 같다.

연말이 되면서 훈훈한 이야기들도 들린다. 빈 병을 모아 어려운 이웃에 쌀을 사서 나눠준 소방관, 폐지를 주워 모은 전 재산을 좋은 일에 써 달라고 기부한 할머니, 지하철을 청소하며 주운 동전에 성금을 더해서 기부한 환경미화원도 있다. `돈세탁은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알려주는 모범사례 같다. 손때 묻은 보잘것없는 푼돈을 깨끗하고 고귀한 돈으로 바꿔 놓는 그들의 숭고한 돈세탁법이 널리 퍼지고 많이 쓰이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나만의 돈세탁방지법이 있다. 빨래를 시작하기 전에 주머니를 확인할 것,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마음세탁도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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