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뿌리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2.12.20 19: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여느 때 같으면 감나무 가지를 심하게 흔들어대고, 게걸스럽게 감을 쪼아대던 직박구리가 보이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도 몇 개 안 남았던 까치밥을 정신 사납게 흔들어대더니, 그마저도 온데간데없다. 감이 있던 자리를 표시라도 하듯, 감이 모조리 빠진 감꼭지만이 덩그러니 가지 끝에 매달려 있다. 이제 번질나게 날아들던 직박구리는 이제 감나무를 찾지 않는다. 정신 사납게 질러대던 괴성이 더는 들리지 않는다. 감나무의 고요한 고독이 시작된다. 아무것도 달지 않고, 온전히 벗은 모습이다.

괴성을 질러대던 직박구리가 찾지 않는 나뭇가지에 제법 토실토실한 참새떼가 날아들었다. 덩치만 커다랗고 배려란 눈곱만큼도 없는 직박구리가 찾질 않으니, 그간 찾지 않던 새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일제히 날아들어 너나 순서 없이 가지에 일렬로 앉는다. 떼로 몰려와 정해진 순서가 있는 듯 일렬횡대다. 일사불란하다. 나무가 온전히 자기 몫이라 터줏대감 행세를 하던 직박구리가 없으니, 반기는 소리도 잃지 않았다. 소리는 가녀리다 못해 맑고 아름답다. 참새가 왔다 가고, 감나무 가지는 메아리를 그린다.

눈이 찾았다. 눈은 바로 땅을 밟지 않고 나뭇가지에 들렀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감을 달았던 나뭇가지에 많은 눈이 앉았다. 올해 움터 하늘로 직각으로 곧장 자란 나뭇가지는 눈을 맞이하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고 자세를 낮춘 가지만이 눈을 맞았다. 오랜 시간 갖은 시련에 연륜을 더한 줄기도 눈을 걸쳤다. 거칠게 터지고 떨어져 나가기 직전의 나무껍질은 곁을 지나는 눈을 쉬 보내지 않고 기꺼이 맞이했다. 여름 내내 매미 소리가 스며든 줄기다. 길고양이가 잡지도 못할 새를 사냥하며 오갔던, 생채기가 난 줄기다.

그치지 않을 것만 같던 눈은, 소복소복 가지를 덮고서야 멈췄다. 덩달아, 수북수북 쌓인 낙엽 위로도 소복하게 눈이 덮었다. 눈이 멈추고 햇살은 눈 알갱이 알알이 마다 거르지 않고 일일이 찾는다. 따뜻하게 보듬어 줌에 알알이 커지다 이내 사르르 자리를 뜬다. 낙엽 위 눈이 먼저 이별이다. 그리고 가지가 눈을 턴다. 바람이 함께하고 참새도 한몫한다. 그러길 한참이 되었건만 줄기는 쉬 눈을 보내지 않는다. 오랜 시간 햇살을 받아 적시긴 했지만, 흔적은 고스란히 갖고 있다. 많은 벌레의 안식처가 된 곳에 눈이 비집고 들어가 수북하게 쌓였나 보다.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녹여 겨우내 버텨야 할 벌레들에게 목을 축이게 할 것인 듯, 너무 건조하지 않게 습도를 맞춰줄 요량이다. 나무줄기는 번질거림 없는 스펀지가 되었다. 어렵게 받아들인 눈을 쉬 내줄 일 없는 나뭇등걸을 닮은 줄기다.

가지 마디마디에, 끄트머리에 순을 틔우고, 꽃을 피웠다. 꽃은 화려하지 않으니 그 누구 하나 눈길 주는 이 없었다. 무성하게 커지는 잎을 달고 열매를 달았을 때도 모두 심드렁하였다. 감꽃 빠지고, 시도 때도 없이 열매가 빠지니 동네 노인들에게 지청구나 들었다. 그렇다고 섧게 생각지 않았다. 감이 익어 가면서도 이쁘게 익어 가는 꼴을 못 보는, 저 하나 잘 먹겠다는 직박구리 때문에 너저분해지고 바닥으로 떨어져 뭉개져도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매해 반복되는 상황이니, 세월이 가도 바뀌는 건 없으니, 모든 거 다 내주고 공허함을 아니 무조건 받아들였다. 존재는 공허할 뿐이라 아는 감나무를 지탱해 준건 줄기였다. 정해진 곳에 심어졌으니 위치를 바꿀 수 없는 것, 회초리 같던 가지가 묵은 가지가 되었다. 해를 거듭하며 무엇이 될 것인가 고민하며 수형을 잡았다. 심하게 부는 바람에 휘청거릴지언정 부러지진 않았다. 안쓰럽게 낭창거리는 가지를 잡아주고, 지나는 바람을 맞아주고 보냈다. 매해 형태가 변해가는 것을 진중하게 보고 있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서 끝내는 등걸이 되겠지? 줄기마저 달려나간 등걸이 되겠지? 그때까지 남아 같이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무성하게 자라고 왕성하게 세력을 키울 때까지 드러내지 않던, 위대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 위대하다고 나지막이 지켜주는 뿌리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