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날의 배추, 다양성과 포용성에 대하여
동짓날의 배추, 다양성과 포용성에 대하여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2.12.20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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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겨울 밤길을 걸어 본 사람은 안다. 어둠이 얼마나 빨리 다가오고 얼마나 천천히 걷히는지. 저녁 무렵 황혼은 서둘러오고, 새벽에는 여명이 오래오래 동녘 하늘을 물들이다가 아주 천천히 산등성이 너머로 햇살을 밀어 올린다.

오늘처럼 깎아야 할 엄지손톱만큼의 그믐달이 늑장을 부리는 새벽엔 날카로운 달빛과 삭풍이 어우러지면서 몸과 마음이 한층 더 스산하다.

추위는 아직 한참이나 남아있지만 절기로는 동지(冬至)를 하루 앞둔 요즘 겨울밤이 가장 깊어지는 때이다. 24절기 중 스물두 번째 절기인 동지는 일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이다. 6월에 속해 있는 하지(夏至)를 지난 이후 점점 짧아지는 낮의 길이는 6달이 지나 동지에 이르러 절정이 되고, 이후 아무리 동장군이 기승을 부려도 햇살은 길어진다. 예로부터 동지를 `아세(亞歲)'라 했으며, 민간에서 `작은 설'로 반겼던 것은 태양이 길어지는 `부활'의 의미를 담은 염원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동짓날이 다가온다는 것은, 매서운 추위에도 마냥 쫄지말고 잘 견뎌 봄날을 기다리는 희망의 빠른 메시지라 하겠다.

해마다 12월이 되면 `마지막'을 떠올리며 떠나보내야 하는 세월과 헤어져야 하는 젊은 날을 아쉬워하지만, 살아있는 한 내일의 태양은 떠오르는 윤회는 어김없다. 새해를 맞으며 더 좋은 날들에 대한 희망과 다짐을 반복하고 있으나, 태양은 이미 며칠 전부터 일조량을 늘리며 서두르는 열성을 보이고 있다.

따지고 보면 절기상으로 일 년은 두 번의 절실한 변곡점이 있을 뿐이다. 동짓날에 절정을 이룬 밤은 그 다음 날부터 반드시 기세가 꺾인다. 그렇게 `노동'을, 그리고 희로애락을 재촉하던 긴 햇살 또한 하지에 이르면 다시 밤하늘에 자리를 내어주는 자연의 섭리는 인간이 미치지 못하는 `포용'이다. 얼마 남지 않은 세밑을 망설이거나 주저함 없이, 지나치게 새로워지고 분에 넘치게 기대하는 새해의 다짐 또한 이미 서둘러 밤과 낮의 길이를 조절하는 우주의 예고보다 더 큰 `품'은 없다.

동짓날을 앞두고 캄캄한 새벽길에서 꽁꽁 얼어 죽은 배추밭을 보았다. 지난 늦가을 남도 여행길에서 창창하게 푸른 배추밭의 광활한 풍경이 회상되면서 쓸모없이 버려진 배추의 가벼운 죽음이 예사롭지 않은데, `치솟는 배춧값을 잡았다.'는 고위 관료의 자화자찬이 씁쓸하게 교차된다.

세상은 해마다 배춧값으로 협박을 받는다. 김장철을 앞두고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되는 배춧값 폭등의 위협이 올가을에는 특히 심해서 한 포기에 만원이 넘는다는 아우성이 풍선처럼 넘실거렸다.

여행길에서 해남 땅 드넓은 황토밭에 즐비한 배추의 푸른 잎들을 보면서, 올해도 김장파동은 미디어에만 있을 것이라는 예감은 어긋나지 않았다.

배추가 속을 채우는데 적당한 기온은 섭씨 15도~ 16도에 해당한다. 대체로 8월 말쯤 씨를 뿌리거나 모종을 심어 김장철에 맞춰 수확한다. 배추 한 포기에 만원이 넘는 때는 이 조건을 맞추기 쉽지 않은 한여름이니, 시장에서 나온 배추가 드물고 가격은 오를 수밖에 없다. 배춧값 폭등으로 불안을 퍼트리는 미디어의 언어는 자연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것이다.

신문과 방송이 금값보다 비싼 배춧값으로 불안을 키우던 계절에는 전통적으로 배추김치는 먹지 않았다. 결실과 수확이 미치지 못한 때여서 가지나 파, 심지어 고춧잎이나 콩잎까지도 김치로 담가 먹으며 김장철을 기다렸다.

요즘에야 집집마다 김치냉장고가 있고, 재배기술도 돈을 쫓아 일취월장하고 있지만, 철모르고 배추김치만을 고집하는 단순한 입맛이 결국 철없이 배추를 불안하게 하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배춧값을 잡았다는 고위 관료의 호언장담은 그들이 고수하는 `시장자유주의'에 모순되는 언동이다. 배춧값 폭등의 호들갑에 재배를 늘리고, 그만큼 제철에는 폭락하는 시장질서의 문란은 언제쯤 고쳐질 수 있는가.

밥상의 김치는 배추와 깍두기로 단순해지고 있다. 자연의 섭리를 외면하는 간단한 먹거리는 생각마저 간단하게 축소시킬 것이다.

동짓날 얼어 죽은 배추의 생명에서 실종된 다양성을 탄식한다. 해를 보고, 달과 별을 위해 하늘을 우러르는 남은 날들을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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