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과 무당
보살과 무당
  •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 승인 2022.12.1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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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보살님 만나고 오는 길인데, 그 보살님이 일러준 말 중에서 이해가 잘 안 되는 대목이 있어서 전화했네.” 학식과 사회적 지위 및 경제적 능력까지 두루두루 갖추고 있는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리고 위와 같은 말을 어색한 듯한 말투로 전해왔다. 친구가 말한 보살님이 누구를 지칭한 것인지 익히 잘 알고 있지만, 전혀 모르고 있는 듯이, 한마디 했다. “아니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수행에 매진했으면, 보살님을 다 친견했는가? 만나 뵌 분이 관세음보살님이었나?” 친구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에이 이 사람아, 신통하다고 해서 2023년 신년 신수점 보러 다녀왔네.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잘 아네.” 친구의 질문 및 궁금증 해결 과정은 생략하고, 차제에 `보살'이란 말의 참다운 의미와 우리 민족 전통문화인 巫(무) 및 무당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보살은 범어 `보디 사트바'를 음역한 `菩提薩 ;(보리살타)'의 줄임말로 보리는 깨달음을, 살타는 유정 중생을 의미한다. 범어는 초기 불교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는 인도 아리아어 계통의 고대 산스크리트어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리고 유정 중생은 겉으로 생각 작용을 드러내는 생명 있는 존재고, 무정은 그 반대의 존재라고 이해할 수 있다. 불교적으로 볼 때, `보리는' 불도 수행 및 그 궁극의 깨달음을 의미하고, 살타는 중생 제도를 의미한다고 평범하게 이해해-정리하면 될듯 싶다. “상구보리 하화중생” 즉,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것. `자각각타 자리이타' 즉, 자신이 먼저 깨닫고 타인을 깨달음으로 인도함으로써, 자신과 타인을 함께 이롭게 하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불교를 신행하는 여신도나 여자 무속인을 보살로 지칭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여자 무속인의 고유 명칭은 巫堂(무당)이다. 巫(무)란 글자에서 드러나듯이, 이 세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사람이란 뜻의 멋진 호칭이 무당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까닭인지 무당이란 말을 꺼리고 보살이란 말을 쓰는 것이 일반화되어 가는 것은 다소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남자 무속인은 박수인데, `법사'로 부르고, 점 집 간판에 불교의 卍(만)자 표식이 보이는 것도 요즘의 세태다.

일제가 민족정기 말살 정책으로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인 무속을 미신으로 폄하한 아픈 과거의 잔재 때문이라면, 하루속히 그와 같은 풍토가 말끔히 척결되길 바란다. 물론 언어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역사성과 사회적으로 널리 통용되면 얼마든지 표준어가 될 수 있는 사회성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올곧은 무속인들이 철저한 자기 수행을 통해 세상의 온갖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참다운 지혜를 갖춘 뒤, 자긍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무당이라고 자칭하면서, 불교적 용어인 보살 법사 卍(만)자 등에 의지함 없이 우뚝 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무당, 박수, 스님, 목사 신부 등 호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호칭은 부르는 이름으로 우리의 육신에 걸친 옷과 같은 역할을 할 뿐, 중요한 것은 누가 우주의 실상을 깨닫고 맑고 밝은 慧眼(혜안)으로 온갖 문제로 갈등하고 괴로워하는 중생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느냐일 것이다. 천지신명이시여! 이 땅 삼천 리 강산에 “光明理世(광명이세) 弘益人間(홍익인간)”하는 巫(무)의 전통이 살아나, 巫(무)라는 글자가 의미하듯, 이 세상의 온갖 문제를 지공무사한 하늘과 연결해 해결하는, 참다운 무당들이 대거 출현하도록 굽어살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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