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집으로
  • 박명자 수필가
  • 승인 2022.12.12 19: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박명자 수필가
박명자 수필가

 

창으로 들어온 볕이 병실 안 눅눅한 습기를 말린다. 창가에 누운 남편 얼굴에 내려앉자 찡그렸던 표정이 펴진다. 안으로 점점 깊게 들어오자 커튼이 하나둘 열린다. 비 온 뒤 만난 볕은 더욱 반갑다. 잔뜩 흐렸던 마음마저 밝아지고 있다.

2주일 전 남편은 응급실로 실려 왔다. 머리맡에 켜진 맥박, 심전도, 산소포화도, 체온 등을 측정하는 기계의 붉은 경고음은 연신 소리를 내며 깜빡였다. 몸에 주렁주렁 링거 줄을 단 남편에게 커다란 기계들이 차례로 들어와 검사를 하고 갔다. 새벽녘에야 검사가 끝났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온몸의 세포가 곤두섰다. 의사가 컴퓨터 앞으로 나를 불렀다. 한 달 전 것과 비교하며 심각성을 조곤조곤 설명한다. 다행히 빠른 대처로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며 날이 밝자 입원실로 옮겨주었다.

남편의 몸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하자, 긴장이 풀리고 피곤이 몰려왔다. 얇은 담요 하나로 밤새워 뒤척이며 잠을 설치는 내게 옆 병상의 보호자가 이불을 얻어다 주었다. 그제야 병실 안의 이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옆집과 거리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곳, 이곳에서는 이웃의 숨소리도, 작은 뒤척임도 여과 없이 들린다. 엷은 커튼 한 장이 높은 담이 되기도 하고, 가까운 이웃으로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고, 필요한 정보를 주고받기도 한다.

마주 보는 병상에 지극정성 아버지를 간호하는 딸과 많은 이야기를 했다. 80대의 아버지가 암이 발견되고 투병이 시작되자 그녀는 3개월간 휴직을 내고 달려왔다고 했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을 함께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요즘 보기 드문 부녀지간의 사랑에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했다.

며칠 전 병원에서 필요한 물건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하늘은 유난히 맑고 푸른데 옆자리가 휑하니 비어 가슴이 저렸다. 남편과 함께 하루빨리 이 길을 따라 집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지만, 진실로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순간은 몹시 드물었다. 우리는 누구나 불행과 고통, 비탄의 날을 견뎌낼 힘을 발견하게 되어 있다.' 요즘 읽고 있는 책, 제인 구달의 『희망의 이유』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2주간 입원하고 있는 동안 주렁주렁 매단 줄이 하나둘 걷히고 남편도 생기를 되찾았다. 입원실의 이웃들도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다.

식사 때가 되자 식판에 몇 가지 찬과 죽이 나왔다. 입맛이 없는지 남편은 몇 숟가락 먹다 수저를 놓는다. 밑반찬 두 가지가 있지만 입맛을 돌게 하지는 못했다. 잘 먹어야 회복도 빠를 텐데. 하루빨리 집으로 돌아가 남편이 좋아하는 찬을 정성으로 만들고 갓 지은 밥과 구수한 숭늉을 맛있게 먹는 상상을 해본다.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남편과 소박한 밥상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이란 걸 문득문득 깨닫고 있다.

오늘 아침 회진 시간에 주치의가 오셨다. 내일 퇴원해도 좋다는 소리에 남편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핀다. 남편의 미소에 귀가 후의 시간표가 자동으로 그려져 내 마음이 바빠진다.

`남편이 편안하게 회복할 수 있도록 온·습도를 적당히 조정해야지. 침구와 옷은 가볍고 따스한 걸로 고르고, 음식은 소화도 잘 되고 남편이 좋아하는 북어 국을 준비해야지.'

따스한 밥상 앞에 부부가 함께 마주하는 것, 45년 누려온 일상이 얼마나 특별한 일이었는지 새삼 깨닫는다. 귀한 줄 몰랐던 그 특별함을 마음껏 누리기 위해 우리 부부는 집으로 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