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길
가깝고도 먼 길
  • 전영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22.12.06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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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전영순 문학평론가
전영순 문학평론가

 

지금 가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 일정을 잡고 떠나기로 했다. 주위에서 설레지 않느냐고 물어도 본인은 아무 감흥이 없다. 기왕 떠나는 길, 다 내려놓고 백지상태로 가려고 한다. 산다는 게 뭐 별것 있겠는가? 그저 물 흐르듯 구름 가듯 나그네처럼 유랑하는 거지. 내심 마음을 다잡는다.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여정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참 고달프다. 한국에서 트리니다드토바고까지 가자면 언어의 장벽은 물론이고 수속 밟는 일이 아주 신경 쓰인다.

다행히도 하늘에서 20시간, 기다리는 시간 12시간 동안 뜬눈으로 보내고 1년 반만의 딸을 만났다. 타국에서 5년째 근무하고 있지만, 딸을 만나러 온 것은 처음이다. 첫해부터 다녀가라고 한 것이 어느새 5년 차가 되었다. 이번에도 형편이 안 되지만, 딸의 말에 떠날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 시국보다 버스킹 리스트 1순위를 못 지킨 것이 더 속상하다고 한다. 버스킹 리스트를 짜 놓고 모두 실천했는데, 엄마아빠 카리브해 여행시켜 드리는 1순위를 못 지켰다는 말에 가슴이 찡했다. 순간 딸의 마음을 읽는 것이 내게 우선순위였다.

오랜만에 만나는데도 둘 사이는 덤덤하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는 하나 우리 모녀는 아직도 줄다리를 가끔 한다. 가능한 아이에게 상처가 될만한 말은 자제하려고 하나 이번 방문도 여전히 둘 사이에 줄다리기할 것으로 예상한다. 결혼 적령기에 있는 딸을 어떻게든 설득해 보려고 왔다. 아이의 일이기도 하지만 부모의 책임도 일부 있는 것 같아 신경이 쓰인다.

지금까지 혼자인 것이 늘 안쓰러웠다. 누구를 만나기도 쉽지 않은 곳이라 엄마 입장에서 남자친구라도 만들어주면 덜 외로울 것 같아 애쓰던 중에 여차여차 관계로 부모들끼리 오고 간 사람이 있어 좋아했다. 아이에게는 부모들이 오간 이야기를 하면 근무에 지장이 갈까 봐 깊은 얘기는 하지 않았다. 일전에 “이런 사람이 있는데 어때?” 정도로 말을 던져놓고 설득하려고 했다. 그런데 출국하기 전전날 상대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는지 없었던 거로 하자는 문자가 왔다. 그냥 친구로 지내도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일방적인 엄마의 생각으로 아이를 설득하려고 했던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어떻게든 결혼시켜야 한다는 부모의 마음을 아이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아이와 여행하면서 깊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엄마로서 더 늦기 전에 결혼시켜야겠다는 마음보다 정에 굶주린 아이를 치료해 주는 것이 더 시급해 보인다. 표정에서 그간의 외로움이 묻어 있어도 엄마 앞에서는 의연하게 대처한다. 거칠고 낯선 곳에서 적응한 결과인지 예전보다 살이 찐 것 같아 그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말았다. 엄마란 이름으로 체형이 캐리비안형이 되었다는 둥 잔소리 아닌 잔소리로 신경전이 오가다가 싸한 분위기는 둘 사이를 간파하고 금세 제자리를 잡았다.

사람마다 타고난 기질과 성향이 다른데 나는 지극히 자기적인 편견으로 아이를 길들이려고 한다. 적극적이고 명랑한 성격으로 굵고 시원한 선을 가지고 있는 아이를 엄마는 소녀소녀한 여성성을 아직도 강조한다. 가치관도 삶의 방식도 시대적으로 급변하는데 어디까지 사회 현상을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한국의 정서와 관습에 젖어 일방적으로 부모가 원하는 이상형으로 자라주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에 아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의 길, 어찌하리오. 이제는 부모가 원하는 소유물이 아니라 한 인격체로 아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내려놓고 지켜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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