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 더해지는 날
그리움이 더해지는 날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2.11.22 17: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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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단풍이 곱게 들기는커녕, 망측한 얼룩이 묻은 듯 검버섯이 생겼다. 여름내 짙던 녹음은 온데간데없다. 단풍이 들려 했던 듯도 한 흔적만이 있다.

색은 퇴색되고 검은 얼룩이 더욱 두드러지다 결국 단풍이 채 들기도 전에 낙엽 신세가 되었다. 차가 지나며 이는 바람에도 감나무 잎은 맥없이 떨어진다. 더는 달고 있기 벅찬 탓일까? 아니면 감을 달고 있어야 하는 과중함의 증상인 건가?

감을 따지 않았다. 첫서리가 내린 지도 한 달여 남짓 돼가는데, 그대로 두었다. 잎을 떨구는 데 감은 떨구지 않았다. 간혹 감이 빠진 꼭지가 보이지만 여전히 주황색이 주렁주렁 가지 끝을 지켰다. 가끔 극성스럽고 허세 작열의 직박구리 때문에 떨어지는 감이 있지만, 말갛게 익어서도 굳건하게 매달려 있다. 아니, 다 잡고 있다.

지나는 사람들, 이구동성 “감이 많이도 달렸네”, 가는 걸음을 멈추고 휴대전화기를 눈높이에 맞추고 검지 끝을 따라 팔이 뒤따른다. 그리고 또 “뭐라 뭐라”. 허리가 굽은 노인들은 감나무 밑에서는 허리를 힘껏 편다. 쪽빛 하늘에 말간 주황색을 담아 발을 옮긴다. 감나무는 그렇게 사람을 세우고 이야기 한마디씩을 듣고 눈인사를 건네고 보낸다.

이번 주말, 엄마 기일이다. 형제들이 모이는 날이다. 그날 감나무는 오랜만에 모인 형제들을 불러 모으고 감을 내어줄 것이다. 감나무 잎을 떨구면서도 끝내 달고 있었던 감을 형제들에게 내어 줄 것이다. 늘 그 자리에서 형제들의 두런두런하는 이야기를 듣고, 늘 많은 것을 내어주는 엄마가 심어놓은 감나무 대봉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나무를 강하게 잘랐더니 감이 많이 달리지 않았다. 대신 단풍이 너무나 아름답게 들었다. 단풍의 왕 복자기나무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는 없을 듯하다. 아직 물을 머금은 잎은 두툼하다. 제법 두께 감이 있는 잎에 발색이 더없이 화사하다. 울긋불긋 환하게 웃는데 무게감이 있다. 달려있을 때나 바닥으로 떨어져 있을 때도 아름다운 색을 발산하고 있다. 역광이 아닌 어떠한 빛에서도 본연의 색을 가졌다.

간혹 보이는 감은 대봉 보다 크다. 많지는 않지만 어른 주먹만 한 큼직한 것을 단단하게 달았다. 제일 약한 나뭇가지라고 하지만 내 몸 하나 늘 가볍게 올려 준다. 많은 가지를 가지고 있진 않지만 제법 연륜을 나무껍질로 자연스레 보여준다. 올해는 힘을 축적하느라 많은 감을 달지 않았지만, 내년은 크고도 많은 감을 내주리라 조용히 말을 건네는 아버지가 심어놓은 감나무 둥시다.

연잎은 고개를 숙이고 물에 녹아 흔적을 지우고 있다. 부평초도 덩달아 물과 한 몸이 되는 듯 보이나 뿌리는 서로 의지하고 있다. 수면을 가득 채웠다. 과하다 싶을 정도의 뿌리는 서리가 내리면서 확연히 드러난다. 언뜻 보면 아무것도 없는 수면인 듯하다. 그러나 물 위 미세하게 내린 뿌리들은 한여름 왕성했던 부평초의 흔적이다. 된서리가 내리고 한겨울 두꺼운 얼음에, 어디에도 의지할 수 없이 노출되어도, 실오라기보다 빈약해 보이는 연약한 뿌리로 버티기다. 두꺼운 얼음 속에 뿌리가 뒤섞여 있다가도 봄이면 여지없이 물 위를 가득 채울 부평초.

이겨내고 버텼으니 이제 쉼일까 싶지만, 어쩌면 더 오래 이겨내야 할 시련을 안고 있을 부평초다. 그럴수록 숫자를 늘리고 뿌리는 다발로 불린다.

잎이 툭 하니 힘없이 떨어진다. 부평초 위에 잎이 떨어진다. 화사하게 색이 물든 감잎이다. 사그라지고 뿌리만 남은 보잘것없는 부평초 위에 커다란 잎이 연달아 떨어진다. 떨어진 감잎은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뿌리를 보듬어 덮는다. 뿌리와 하나가 된다.

무더운 여름 그늘을 만들어 주고, 한파에 에는 겨울, 이겨내고 버텼음에 환하게 보듬어 주는,

불러도 애달프게 불러도 더 애달파지는 아버지, 내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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