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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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2.11.22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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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세상은 모두 다 `순간'이다. “한순간도 걷지 않았습니다. 계속 뛰어다녔습니다. 의료진에게 인계할 때, 다른 구급대원에게 이송 지시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순간도 걷지 않고 뛰어다녔습니다.”

문장을 읽으면서 이토록 가슴이 꽉 막히는 기억이 있었는가. 10월 29일, 구급대원의 행적을 전달한 `말'이 `문장'이 되어 눈앞에 있는데, 그중 한 단어, `순간'이 비수가 되어 온몸을 할퀸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순간'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괴롭고 미안한 마음에 잠을 설치다가 나선 새벽 산책길에서 문득 야윈 그믐달을 발견한 것도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던 `순간'이었다. 율량천 좁은 냇가를 헤매는 어린 고라니 한 마리를 만난 것도 `순간'이었다. 어느 순간 길을 잃어 사람이 만든 길로 잘못 들어선 고라니의 위기도 `순간'에서 시작된 혼란일 것이다.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던 시각도 `순간'이었고, 사람에 짓눌려 참사를 당한 비극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의 발걸음으로 시작되었다.

몇 걸음 앞의 `순간'을 전혀 알 수 없는 인파는 태산 같았고, 눈앞에서 생명이 무너지고 있는 `순간'은 얼마나 무서웠을 것인가.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뛰어다닐 수밖에 없음은 구급대원이라서 당연한 것은 아니다. 그 순간순간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내기 위해 달려들었던 시민들이 가슴에 소중하게 품고 있는 인간의 양심이고, 박동하는 심장의 순간을 위한 간절한 염원이었다.

시인 고은은 `작은 시편' <순간의 꽃> 후기 `이 시의 길을 가면서'를 통해 `순간'을 말한다. “나도 누구도 매 순간의 엄연한 기운과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존재 자체가 변화 미분(微分)들의 순간을 이어가는 것 아닌가.”

`순간'을 견디지 못한 10월 29일 참사의 희생자들은 더 이상 이어갈 `순간'이 없다. 생명의 존엄함을 지키기 위해 발 동동 뛰어다녀야 했던 구급대원과 심폐소생에 나섰던 시민의 `순간'과 `순간'은 우리 사회의 존재 가치를 일깨우는 처절한 사투였으며 희망이었다.

세상의 모든 `순간'은 눈앞에 있다. 다만 우리 눈이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가 아니어서 다른 빛에 의지할 수밖에 없으므로 `순간'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의 `순간'은 눈앞에 있지 않고 손 닿을 수 없이 먼 권력에 있다. 그렇게 멀리 있는 빛 때문에 눈앞의 위기를 볼 수 없을 때, 참극은 벌어진다.

걸어서 10분 거리를 관용차를 타고 권력을 만끽하느라 밀집의 위기를 감지하지 못한 치안의 `순간'도 있다. 만일의 걱정에 그저 대기만 하고 있던 순간들도 있으니, 그 `순간'에는 생명과 시민은 없다.

다시 시인 고은은 말한다. “그 동안 오래 공부한 시간론으로서의 `찰라'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찰나 중에 9백 생멸이 있는 것으로 말하다가는 수습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저 눈 깜짝할 사이라는 그 순간의 어여쁜 의미가 세상과 맞으리라 여겼다.”

“한순간도 걷지 않았습니다. 계속 뛰어다녔습니다.”는 구급대원의 탄식은 양심과 올바른 지식, 혹독한 훈련에 의해 체화된 `순간'의 본능이다.

`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세상에 있을까. 삼라만상은 `순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순간'을 이어가지 못하는 모든 생명은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하물며 겨울을 앞두고 떨어지는 나뭇잎마저도 낙하해야 마땅할 순간이 있고, 사람의 목숨도 언젠가는 떠나야 할 순간이 있다.

세상의 모든 `순간'은 위대하고 존엄하다. 모면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 타락한 `순간'마저도 수없이 많은 준비와 고민이 있을 것이다.

그런 꼼수 말고 진정으로 국민의 생명 존중과 불안하지 않는 나라를 위해 양심으로 가슴을 채우고, 본능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순간'을 위해 학습과 훈련을 거듭하는 더 높은 권력의 `순간'들이 참고 기다리면 올 수 있는 세상의 `순간'은 올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모든 의심과 악의 화신을 떠나 보내는.(지킬 앤 하이드 中)'. `순간'이 금방 사라질 것이라고? 아니, 기억에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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