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밥상
엄마의 밥상
  • 서두상 충북도 농식품유통과 주무관
  • 승인 2022.11.17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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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서두상 충북도 농식품유통과 주무관
서두상 충북도 농식품유통과 주무관

 

주말 동안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내렸다. 바람을 동반한 가을비에 위태하게 버티던 단풍잎들이 나무 밑동에 하나, 둘 깔렸다.

하루하루 느리게 버티던 나와 달리, 떨어지는 나뭇잎의 속도만큼 빠르게 가을이 스쳐 간다. 계절처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나는 가끔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허기질 때가 있다. 그런 날에는 산해진미 다 제쳐두고 소박한 엄마의 밥상이 먼저 생각난다.

어릴 적부터 주방은 늘 엄마의 자리였다. 음식 솜씨만큼이나 손도 빠르신 우리 엄마는 어떤 음식이든 맛깔나고 빠르게 만드셨다. 충청도 내륙 출신이면서도 바닷가 생선이나 해물들을 곧잘 식탁에 올릴 정도로 요리의 폭도 넓었다. 덕분에 식구들은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다양한 요리를 접하는 호사를 누렸다.

자녀들이 초등학교 입학 후 전업주부로 지내신 엄마에게 가장 어울리는 공간은 단언컨대 주방이라 생각했다. 마치 주방은 태초부터 엄마와 함께하기 위해 생겨난 불가분의 장소라고 굳게 믿었다.

중고등학교를 거쳐 성인이 되어서도 주방과 엄마의 관계는 자연법칙처럼 명확하게 이어졌다. 엄마의 밥상에 올라오는 익숙한 국과 찬들은 여전히 맛있고 정갈했다. 달라진 거라면 낡고 허름해져 광을 잃은 식기들과 데쳐진 나물처럼 처진 엄마의 뒷모습뿐이었다. 당연해 보이던 일상의 주방이 낯설어지는 순간이다. 어쩌면 나는 아직 이 낯섦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익숙함에는 늘 꼬리표처럼 타자의 희생과 배려, 사랑이 동반된다. 생선 손질의 번거로움과 특유의 비린내라는 재료에 마늘과 양파의 매운 향 때문에 흘린 눈물을 첨가해야 엄마의 밥상이 완성된다. 생각해보면 엄마의 밥상은 늘 고봉밥 같은 희생과 된장찌개처럼 구수한 배려, 봄나물처럼 향긋한 사랑으로 가득했다.

아들 둘을 키워보니 먹이는 것만큼 손이 많이 가고 중요한 일도 없다. 맞벌이 부부라는 허울 아래 우리 부부의 밥상은 아이들에게 실로 초라했다. 요리를 자주 하지 않으니 솜씨가 없고, 솜씨가 없으니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지 못했다.

게으른 나에게 요리는 귀찮은 행위였고, 귀찮음의 대가는 인스턴트와 밀키트라는 간편식품으로 차려진 아빠의 밥상이었다. 아빠의 밥상에는 고봉밥 같은 희생이나 된장찌개처럼 구수한 배려, 봄나물처럼 향긋한 사랑은 어디에도 차려져 있지 않았다.

이런 내게 주방은 그저 개수대 앞에 서서 잔반을 치우고 설거지나 하는 단순한 작업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음식물쓰레기를 봉지에 담아 버리러 가는 내 뒷모습만이 아이들에게 가장 익숙한 아빠의 밥상이 되어버렸다.

호박잎처럼 늙어버린 엄마의 손도, 입맛이 변해 점점 더 짜지는 엄마의 반찬들도 나는 아직 낯설다.

요식업체 대표이자 방송인인 백종원씨의 조리법을 유튜브 동영상으로 시청하며 조리하는 주방의 내 모습도 아직 어색하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주방은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주방은 만인에게 평등하고 또 그래야만 한다. 아빠의 밥상도 충분히 먹음직스러울 수 있다. 비록 서툴고 어설프지만 구색을 갖춘 재료들이 어울려 제법 요리 흉내를 내는 요즘이다.

아이들 밥상을 차리며, 주방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아빠의 밥상은 풍족해진다는 단순한 사실을 어리석게도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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