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부른다는 것
이름을 부른다는 것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2.11.15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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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이름이 논란이 되는 기이한 세상에 살고 있다. 시민언론 `민들레'의 이태원 참사 희생자 가운데 155명 명단 공개가 격렬한 사회적 `파장'을 만들고 있다.

158명으로 늘어난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이 졸지에 그 `이름'마저 차단되거나 거부되는 까닭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지시'에 의해 일방적, 전격적으로 `국가애도기간'이 정해지고, 서둘러 합동분향소가 차려질 때만 해도 슬픔의 국민적 공유 내지는 공감의 착하고 경건한 사회적 순환구조를 기대했다.

위패와 영정사진이 역시 `지시'에 의해 허용되지 않고, 그 후로도 희생자들의 이름이 철저히 가려진 상태가 지속되면서 애도의 대상은 어긋나고, 사람들의 슬픔은 넓어지지도 깊어지지도 않는다. 이해하기 힘든 `국민애도기간'이었고, 참으로 이상한 참사에 대한 대처방식이다. 가슴에서 절대로 지워질 수 없는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살아 생전의 모습을 뇌리에 간직할 수 있는 사진의 부재는 통곡의 대상을 실종시키는 패륜이다.

155명 희생자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그리하여 국가의 무능이 방치한 책임의 엄중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을 향한 공개의 실천이 살 떨리고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용기에 해당하는 일인가. 유독 이태원 참사에 대해서만, 특별하게.

마침내 시민언론 `민들레'의 희생자 명단 공개의 결단이 이루어진 날. 비로소 `꽃'으로 되살아나는 `이름'들을 보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이태원 참사는 희생자들의 원혼과 가족들의 원통에도 불구하고 `법적 책임'과 `놀러간 게 잘못'이라는 이분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법적 책임'이라는 것도 인파 관리나 112신고 대응 등 `아래'쪽의 부실에 대해 절대로 셀프일 수 없는 셀프수사에 휩쓸려 잘라낼 꼬리의 크기만 저울질하고 있다. 이름은 가리고 `보상'과 `위로금'을 강조하는 것은 이태원 참사를 `재난'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겠다는 속셈이 담겨 있다. 게다가 `핼러윈'과 `놀러 감'을 은근히 연상시키면서, 또 다시 `세금 낭비'라는 시비의 편가르기를 겨냥하고 있다는 의심도 만만치 않다.

이름은 존재의 가치를 규정하는 상징이다. 그러므로 `이태원'이라는 장소의 특정화 대신 `10.29 참사'로 이름하겠다는 시도는 장소에 대한 기피와 두려움에서 벗어나 상권의 2차 피해를 예방하는 순기능이 있다.

`참사'에 희생됨으로써 실체를 죽음에 빼앗긴 희생자들을 통한의 기억으로 소환하는 일을 `이름' 아닌 그 무엇으로 가능할 수 있는가.

국가는 재난 대응의 적정성을 먼저 따져야 하고, 그 근본에 대한 뼈저린 반성과 극복을 통해 처참하고 부끄러운 역사의 반복을 차단하겠다는 결단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보상'과 `위로'로 모면하는 대신 국민 모두가 희생의 이름을 절절하게 부름으로써 생명의 존엄과 국가의 무한책임에 대한 비망록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국가가 설마 희생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이 피해 가족들의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분노와 저항을 원천 차단하는 가장 효과적인 대응으로 생각하겠는가.

`이태원' 혹은 `10.29'참사는 극단적인 테러이거나 침략의 소행도 아니고, 여러 번 거듭되었던 악덕 건설업자에 의한 부실시공의 징후도 아님은 거의 명확하다. 무능하고 무책임하거나 특정 범죄에 대한 성과 지상주의 또는 최고 권력에 몰두하는 치안의 편중은 지적되고 있으나, 아직 뇌물로 부실을 방조한 탐관오리의 흔적도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축제를 즐기는 평화의 시간, 도시 어디쯤 에 아주 흔하게 일상으로 마주칠 수 있는 골목길에서 벌어진 압사의 참극은 그러므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더욱 커다란 비극이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평범한 일상조차 두려운 사회적 현상과 국가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는 공감의 애도와 위안의 절규와 같다. 애타게 부르면서 상실의 슬픔을 극복하는, 이름은 연대의 시작이다. 세상에 이름 없는 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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