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 밥 · 빵
쌀 · 밥 · 빵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2.10.2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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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상강(霜降)이 지나면서 정북동토성을 감싸고 있는 정하 들판도 몸을 비우고 있다.

아직 깊은 어둠이 지워지지 않은 이맘때 들길을 홀로 걷는 것은 한 여름의 그것과는 몹시 다르다. 들판을 가득 채운 여름의 싱싱한 벼들은 주체하지 못하는 기운을 수직으로 치켜올리고 있고, 일찍 솟아오른 태양은 햇살을 푸른 볏잎에 듬뿍 뿌리며 영롱한 산란(散)의 빛깔이 환호하는 들판을 만든다.

가을이 오면 벼꽃이 진 자리마다 영글어가는 열매의 경건함으로 다시 흙으로 향하는 줄기의 끝. 그렇게 황금빛으로 물든 들판을 위해 일출도 서두르지 않고, 밤은 길어지면서 평화를 기대하게 된다.

가을걷이가 마무리되고 있는 들판이 안녕하지 못하다. 모든 것이, 욕망과 가난마저도 온통 올라가는 고난의 세상에 유독 쌀값만이 곤두박질하고 있으니, 농민들의 속은 콤바인 발길에 치여 쓰러진 볏짚만도 못하다.

자고로 `농자천하지대본'은 농사가 생명의 본질이라는 믿음의 준거다. 아무리 과학 기술이 놀랄 만큼 진화했다 하더라도 농사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 즉 `본질'의 위치에서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다. 그중에서도 `쌀'은 특히 본질의 가장 핵심에서 흔들릴 수 없는 작물인데, 쌀값이 폭락하고 있으니 숙살(肅殺)의 계절에 빈 들판이 어찌 서럽지 않겠는가. 요즘 쌀값은 지난해 보다 무려 24.9%나 떨어져 1977년 쌀값 통계 작성 이후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 쌀농사를 짓는 농민들의 시름 또한 쌀이 없어 배곯던 시절을 탄식하던 반세기 전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심정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는 간신히 쌀을 구해 자식들에게 밥을 해 먹인 뒤 `배 꺼질라 뛰지마라'고 당부하던 기억이 생생한 세대와 혼밥이 일상인, 밥보다는 빵이거나 인스턴트 식품에 훨씬 익숙한 세대가 뒤엉켜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 밥은 외로움에 사무쳐 간절하게 그리운 `집밥'의 특별함으로 남아 있고, 보통의 젊은이들은 `공장'에서 만든 밥으로 끼니를 때운다. `껌값'보다 못한 하루 평균 390원의 쌀값을 쓰면서도 쌀 소비는 해마다 줄어들고 있음을 쌀값 폭락의 이유로 둘러 댈 일은 아니다.

풍년이 들어 쌀의 생산이 늘어난 까닭이라는 변명도 구차하다. 끼니를 거를 수 없는 것은 `생명'에 있고, 쌀은 반드시 지켜야 할 `본질', 즉 `있어야 할 것'의 자리에서 물러설 수 없다. 시인 김지하의 말처럼 `밥'이 `생명'이니, `쌀'은 그 생명의 본질에 해당하는 경외의 대상이어야 한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김지하. 밥은 하늘입니다> 탐욕을 점점 키우고 있는 가진 자들이 혼자 독차지하려는 `하늘'과 기계에 목숨을 잃은 스물 세 살 빵공장 노동자가 서둘러 떠난 `하늘'이 같아질 수 있는 세상은 아직 남아 있을까.

밑동이 잘리고 나락만 훑어 포집한 콤바인의 위력에 쓰러진 볏집의 주검에 떨어지는 느린 햇살에서 젊은 노동자의 빼앗긴 생명의 서러움이 흐린 안개처럼 부서지고 있다.

절대로 `혼자'여서는 안되는 불안한 빵 `공장'에서 위험천만한 기계에 온몸을 내던질 수밖에 없던 스물 세 살 여성 노동자가 무릅쓴 죽음은 혼자의 몫이 절대로 아니었다. 스스로와 가족들을 견디게 하기 위한 안간힘과 사무치는 외로움, 불안하고 두려운 위험을 참아내야 하는 `생명'의 전부이다. 그가 만든 `공장'의 빵이 설령 쌀마저도 살 수 없거나, 시간에 쫓기는 가난한 노동자 혹은 늙고 병든 이들의 `생명'일지언정, 남은 것은 우리 모두의 비극이다. 절대로 사람 세상에서는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사람이 먹는 것을 만드는 대기업 SPC그룹의 탐욕과 잔인함, 생명과 노동의 존엄을 무시하는 폭거는 더 이상 거론할 가치조차 없다. 다만 우리의 소비가 `생명'을 위한 섭취 대신 왜색 캐릭터에 정신이 팔려 노동자를 혹사하면서 자본을 살찌게 하는 본질의 왜곡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데도 SPC의 빵과 도넛, 아이스크림, 커피를 사 먹어야 하는지, 몸을 비우고 있는 들판에서 생명의 쌀·밥·빵이 우리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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