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안에 사는 날
나무 안에 사는 날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2.10.2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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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여름을 폼나게 만끽하던 나무가 꽃을 피우고 떨어내고를 수없이 반복하며 버티다 끝내 마지막 꽃을 떨구었다. 마지막 피워낸 꽃은 씨를 맺지 못하고 힘없이 떨구어졌다. 계절의 시간을 거역할 수 없는 배롱나무다. 그러건 말건 뒤늦은 꽃을 피운 칸나는 대를 꼿꼿하게 세우고, 꽃부리를 다부지게 벌려 색을 자랑하고 하고 있다. 붉게 물든 단풍의 끝판왕 복자기 단풍이 무색할 정도다. 전멸에서 회생한 노고를 보상받으려 함은 아닐 텐데 시간이 지나며 지닌 색이 더욱 확연하다. 가을이 시작되던 날 자그마한 꽃을 피우고 색이 바래던 수국은 파리해졌다. 머리만 한 꽃송이가 색을 달리하며 벅찬 관심을 받았던 녀석인데, 이젠 본디 꽃받침의 형태가 사그라져 꽃이 피었었다는 흔적만을 가늠해 볼 뿐이다.

일찍 피운 꽃은 일찍 져버렸다. 늦게 피운 꽃은 느지막하게 오래 버티고 있었다. 제아무리 오랜 시간 꽃을 피운다 하더라도, 시간에 순응함에 만년의 시간을 피울 수 없지 않던가? 꽃이 오래간다는 나무는, 지면서 피우고를 거듭 반복하는 이유에서 그리 인식되었을 것이다.

더러 자그마한 꽃을 피우고 버티던 수국이 잎에 병이 들더니 잎을 떨구었다. 제법 물이 오른 잎에 반점이 생기더니 흰 가루 같은 것들이 생겨나더니 힘없이 땅으로 떨구어졌다. 아직 두툼한 잎인데 저리 쉽게 떨어지는 건가? 해를 거듭하며 이제 제법 무게를 감당할 연륜도 되었을 터인데, 버거웠나 보다. 아래부터 잎을 하나 둘 떨구기 시작한다. 줄기에서 떨어져 나온 낙엽은 이내 마르고 색이 발했다. 주섬주섬 주워 수국 주변으로 가지런하게 모아준다. 겨울을 나기 위한 눈을 보호해주기 위해서다. 낙엽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감이 익어갈수록 잎은 서둘러 자리를 떠난다. 느지막하게 돋은 잎부터 떨군다. 순을 올릴 때와는 확연히 다르게 너무 쉽게 잎을 떨구는 게 아닌가 싶다. 가장 일찍 순을 펼친 잎은 아직 역할을 다하지 않았기에 나무는 놓아주질 않는다. 먼저 나왔는데 마지막까지 소임을 다하라니 이 억지스럽지만, 나무의 섭리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끝내 나무와 함께 있었던 잎도 마지막 잎이 되어 떨구어질 때쯤에는 눈이 만들어져있다. 그것이 잎눈이건 꽃눈이건 간에 다음해를 기약하는 겨울눈이다.

잎은 한 해 다부지게 제구실을 다 함에 미련 없이 나무에서 내려온다. 나무에서 내려오며 대지를 융단으로 덮는다. 색이 발했다지만 많은 벌레의 안식처가 되어준다. 한해의 수고로움을 한겨울이 돼서도 마다하지 않는다.

나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잎을 떨군다. 잎자루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떨켜가 생긴다. 외부의 세균으로부터 나무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잎을 떨구면서 눈을 만들고 겨울을 버틴다. 겨울을 이겨낸 나무는 눈을 틔우고 순을 올리고 잎을 펼친다. 해를 거듭하면서 못 오를 곳이 없다는 등나무나 사방으로 거침없이 뻗어나가는 팽나무가 연륜을 더한다. 땅속 깊숙이 뿌리를 묻고, 여름의 시작 전부터 분주했던 나무는 한여름에 성장의 절정에 달한다. 사방으로 뻗쳤던 가지의 잎으로는 원 없이 광합성을 하고, 만들어진 양분은 뿌리로 내리고, 뿌리에서는 물을 빨아들인다. 부름켜의 왕성한 활동으로 성장과 내실을 균형 있게 유지하면서 강해진다. 못 자랄 곳이 없고, 안에서 밖으로 자란다. 해를 거듭하며 껍질은 갈라지고 벗겨진다.

나무는 매번 찾아오는 꽃샘추위와 변덕스러운 비바람에 휘청거리긴 했지만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다. 싹이 트는 것을 쉽게 내보이지 않았으나 여지없이 꽃을 달고 열매를 키워냈다. 그리고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소임을 다한 잎을 떨구었다. 그리고 매년 해를 거듭하면서 한 해도 거름 없이 몸집을 키웠고, 많은 것을 맞아들였다. 그렇게 연륜은 침묵하면서 의연한 나무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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