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는 가난을 실어 나르는가?
기차는 가난을 실어 나르는가?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2.09.20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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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동이 트지 않은 새벽녘 기찻길이 요즘 들어 유난히 적막하다. 청주의 유일한 기찻길인 충북선은 무심천 문암생태공원 옆 철교를 지난다. 새벽 산책길에서 쿵쾅거리며 철교를 건너는 기차를 만나는 일은 심장 박동과 연동되어 살아있음과 힘차게 살아갈 새로운 하루를 다짐하는 충동이 된다.

코로나19로 세상이 시름에 빠지기 전에는 한 시간 남짓 무심천 둔치를 걷는 동안 동쪽으로, 서쪽으로 오가는 기차의 긴 행렬을 서너 차례 만날 수 있었다. 팬데믹의 그늘이 짙어지고 길어지면서 기차를 발견하는 횟수가 차츰 줄어들더니, 이제는 어쩌다 한번 만나는 경우가 점점 더 잦아지고 있다. 어두운 새벽에 무심천을 건너는 기차는 대부분 시멘트를 실어나르는 화물 열차들이다.

느긋하게 늑장을 부리는 주말에는 일출을 마주하며 동쪽으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여객열차도 만날 수 있는데, 떠오르는 해를 정면으로 받으며 달리는 기차의 늠름함과 차창에 반사되는 햇살이 장관이다.

나는 무심천 철교를 전혀 무심하지 않게 건너는 기차의 행렬을 보면서 살림살이를 가늠하고 걱정하는 습관이 있다. 기차가 분주하게 오가는 때는 당연히 경기가 좋은 징조일터이고, 요즘처럼 물가가 크게 오르고 경제가 불안한 사정은 기차가 먼저 알고 운행 횟수를 먼저 줄인다.

아주 가끔 오송역 근처를 지날 때 먼발치에서 볼 수 있는 KTX의 길고 날쌘 자태와 달리, 충북선을 오가는 여객열차는 육중한 기관차가 겨우 4량의 객차를 매달고 다녔다. 그나마 살림살이 걱정이 커지는 요즘에는 달랑 3대만 끌고 다니면서도 차창으로 보이는 열차 안의 모습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금방이라도 지축을 울릴 듯했던 우리 고장의 새 철도 얘기가 쏙- 들어갔다. 그 자리를 `레이크 파크 르네상스'가 온통 차지하고 있는데, `호수공원 부흥'의 원뜻으로 번역하고 보니 그것 또한 기이하다.

빠르지 않지만 느긋하게 그리고 자주 오가며 시멘트를 실어나르고 간간이 다른 물건 여럿을 한꺼번에 옮겨주는 기차의 존재가치를 `강호축'과 광역철도는 얼마나 배려했는가.

청풍호와 대청호, 그리고 757개나 된다는 충북의 호수가 언제 `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에게 친근했으며, 융성했길래 `르네상스' 하는 것인지. 섬섬히 빛나는 `구호'가 어지러운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어느 새벽 뒤따르는 화물열차이거나 여객열차 한 대 없이 기관차 한 대만 덩그러니 무심천 철길을 덜렁거리며 건너는 기차는 끝내 위태로운 일이다. 실어나를 물건이 없거나, (짐을) 잘 옮겨 깨끗하게 비운 기차를 다시 채우지 못하는 사정일 터이니, 억지로 철길을 거슬러 가는 기관차의 에너지는 허무하다.

빈 몸으로 무심천 철교를 건너야 하는 기차의 시름만큼 작금의 시대 상황은 엄중하다. 역할과 본분을 잃어버리고 시간표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기관차는 단말마의 처지와 다르지 않은데, 정책은 현장보다 환상에 훨씬 더 가깝다.

홀로 충북선 철길을 지나는 기관차를 보며 “피의자로 출석하면서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를 지니고 있었다.”는 2000년대 초반 최규선 게이트 관련 기사의 사족이 떠오른다. 정권이 바뀌면 선명하고 싶은 모든 `새로움'은 `황금 구속복'(Golden Straitjacket)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규제 완화와 무역자유화, 민영화, 관세 및 부자세 인하 등의 구속력을 추구하는 `자유경쟁과 시장경제'의 유령이 옛날 최규선이 토마스 프르드먼의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로 상징하고자 했던 세계화를 통한 번영의 집착처럼 시대를 거스르며 떠돌고 있다.

여태껏 선량한 나라로 믿어왔던 미국이 빗장을 걸어 잠그면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안을 통해 한국의 전기차 시장을 위협하는 국가 주도 경제 전략으로 돌아선 것은 민간 주도 경제와 상관없지 않다.

`새로움'을 선명한 구호로 삼아 성장에만 집착하기보다는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가진 것, 찾지 못하는 것을 성찰함이 더 절실하다. 텅 빈 기차가 쓸쓸하게 지나는 철길을 당장 채울 것은 사람들의 먹고사는 일, 민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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