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다 할지라도
당연하다 할지라도
  • 반지아 괴산 청안초 행정실장
  • 승인 2022.09.18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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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반지아 괴산 청안초 행정실장
반지아 괴산 청안초 행정실장

 

불과 며칠 전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 과분하다 느껴질 정도의 격려를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들었던 기분이란 마치 가정 내에서 한 번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가 다 큰 성인이 되어서 처음으로 따뜻한 말을 들었을 때 느낄만한 것이었다. 낯설었고 따스했다.

사회인으로서 공식적인 첫 발걸음을 뗀 후 가장 아프게 배운 건 바로 “당연하다”는 말의 의미였다. 그 당시 모든 것이 서툴렀던 내 눈에는 이미 몇 년 혹은 몇십 년의 경력을 가진 이들이 하루하루 해내는 것들과 일정 기간을 두고 이루어 내는 것들이 다 대단해 보였다. 하지만 그 누구 하나 뿌듯하다거나 자랑스럽다거나 하다못해 개운하다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것은 마치 우리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상의 루틴인 것 마냥 너무도 가볍게 흘러갔다. 지금 돌이켜보면 미련하게 순수한 마음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모든 순간순간을 잡아 억지로라도 다 헤집어 그들이 애쓴 모든 것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당연하다.”의 칼날을 나 역시 피해 갈 수 없었다. 쌓아온 몇 년의 시간 동안 내가 하는 어떤 것도 예외 없이 사고나 실수 없이 해온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이, 그러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는 매서운 질책이 이어지는 날들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는 말로 묻히는 수많은 노력과 그 노력을 만들어내는 이들을 생각해 본다. 또한 “그 자리에 있으면 이 일은 당연히 잘해내야지, 이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니야? 넌 당연히 잘 해 낼 줄 알았어.”라는 말에 짓눌려 열심히만 하다 갑작스레 모든 것을 멈출 수밖에 없던 사람들과 깨닫지 못할 뿐 멈추기 직전까지 도달한 사람들도 떠올려본다. 누구의 잘못인가. 형태가 없는 사회 탓을 하기엔 그 안을 이루는 우리의 모습을 너무도 오래 외면했던 것이 아닐까.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또한 당연하다는 말이 주는 하루가 멀게 커지는 부담감을 끝끝내 버틸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다. “무슨 애도 아니고 칭찬 스티커라도 줄까? 열 개 모으면 사탕 사줄게~”라는 말을 한다면 나는 기회다 싶어 덥석 그 제안을 잡겠다. 물론 제안자나 수용자나 사탕을 먹을 나이는 지났으니 마땅한 보상과 칭찬의 방법은 같이 협의해 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나이를 먹고 경력이 쌓이면 업무에 대한 노하우나 대처능력은 단단해질지 몰라도 우리의 마음까지 마치 기계를 꽉 조이고 있는 너트와 볼트처럼 굳세어지는 것은 아니다. 되레 그 시간을 버티느라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점점 종잇장처럼 얇아지며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나 경험이 아니더라도 누구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다못해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너무도 쉽게 찢어지고 만다. 그렇기에 그럴수록 누군가의 일상을 지켜주는 또 다른 이의 노력에 나를 빛나게 하는 너의 애씀에 더더욱 아낌없는 칭찬과 적절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나를 버티게 하고 너를 지켜주는 가장 쉽고도 바른 방법이다.

옛말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다. 묵묵히 밭일을 하는 시간 외에는 늘 외양간에 있으리라 생각한 소도 어느 순간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간다는 데, 하물며 사람은 어떨까. `굳이'라는 의문이 머리를 채우고 무상함이 마음을 메우는 순간 그 누군가가 어떤 선택을 할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외양간은 뚝딱뚝딱 고치면 되는데 그 빈자리는 또 누군가에게 고통으로 넘겨질는지 아득한 현실에 한숨이 차곡차곡 쌓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늘도 버티고 있는 너와 나를 위해 `성과'만큼이나 `노력'이 인정받는 사회가 오길 바란다. `여우'가 받는 대접을 `소'도 받을 수 있는 세상이 오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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