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마음이 대한의 혼이다' 예관 신규식 선생을 생각하며
`우리의 마음이 대한의 혼이다' 예관 신규식 선생을 생각하며
  • 김명철 제천교육지원청 교육장
  • 승인 2022.09.12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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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제천교육장
김명철 제천교육지원청 교육장

 

순국 100주년을 맞이한 예관 신규식 선생(申圭植, 1879. 1.13~1922. 9.25)은 평생을 한쪽 눈 애꾸로 세상을 흘려보며 살다가 서거하신 분이다. 그래서 자호도 `흘려본다는 뜻의 `예관'이다.

한 번도 아닌 3번에 걸친 자결 순국 시도 끝에 결국 1922년 9월 25일 “정부” “정부”를 외치며 숨을 거두고 말았다.

선생이 남긴 명저(名著) `한국혼(韓國魂)'은 이렇게 시작된다.`우리의 마음이 곧 대한의 혼이다. 마음이 죽어버린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없고, 망국(亡國)의 원인은 이 마음이 죽은 탓이다 … 우리의 마음이 곧 대한의 혼이다. 다 함께 대한의 혼을 보배로 여겨 소멸되지 않게 하여 먼저 각자 자기의 마음을 구해 죽지 않도록 할 것이다'

2022년 올해로 선생의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 청주의 뜻있는 어른들이 100주년 기념사업회를 조직해 활발하게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필자도 추진위원으로서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도 하고 답사단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선생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재평가되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선생의 많은 업적 가운데 핵심적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를 할 수 있다.

첫째는 독립운동방법론인 외교중심론과 무장투쟁론이라는 두 가지 운동노선을 접목시켰다는 점이다. 선생은 혁명가적 열정과 선각자적 혜안을 함께 갖춘 탁월한 지도자였다. 선생은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해 손문 등과 교류하며 중국신해혁명에 참여했다. 이후에 중국국민당정부가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가능하도록 한 원인이다. 특히 선생과 손문의 혁명적 동지애는 특별한 관계로 발전하여 이후로도 지속적인 지지와 지원이 변함없이 계속됐다.

둘째는 3·1 독립운동과 상해임정 수립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선생은 1917년 조소앙, 박용만 등 13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대동단결선언'을 선포했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독립운동 기관 즉 정부 조직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그리고 국내와 일본 등에 동지들을 비밀리에 파견하여 2·8 독립선언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셋째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고 중국의 상해에 거주하던 선생은 프랑스 조계에 4월 11일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상해에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이곳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은 순전히 예관 선생의 노력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1919년 5월 선생의 노력으로 손문 등 중국 광동정부로부터 국가승인도 얻어내는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 선생은 광동으로 손문을 직접 찾아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수립 후 고질적 파벌의식과 지역감정 등이 뒤엉켜 1921년 4월 이후 임정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선생은 병원에 누워 의정원 회의 참석을 거부했다. 이듬해까지 병석에 누운 선생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국인들이 단합되지 않는 것을 통탄하면서 9월 1일 단식을 선언하였다. 그 후 25일 동안이나 3불을 고집하며 순국을 결심했다. 3불은 불식(不食), 부언(不言), 불약(不藥)을 말한다. 1922년 9월 25일 `정부… 정부…'희미한 목소리가 선생의 단식 25일 만에 처음 나온 말이며 선생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가덕면 인차리 선생의 고향에는 선생의 묘소와 생가가 있다. 예관 신규식 선생의 유적지를 찾아서 답사를 하며 선생의 나라 사랑 정신을 되새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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