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 충주
조선시대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 충주
  • 김태홍 충북도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장
  • 승인 2022.07.10 17: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김태홍 충북도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장
김태홍 충북도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장

 

근대 이전에는 각 지방의 조세를 서울까지 배로 운반하는 조운(漕運)이 크게 해로로 운반하는 해운(海運)과 내륙수로로 운반하는 수운(水運)으로 구별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후기에 이르러 왜구들이 조세와 조운선을 약탈하는 일이 잦아지자 고려 조정은 조운제도를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였다. 이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은 자신의 경제기반 확립을 위하여 조운을 재개하고 전제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은 왜구의 노략질 및 해난사고 등의 망실을 해결하고자 왜구에 의해 파괴된 고려의 13조창을 조선의 9조창으로 개편하여 수운을 강화하였다.

이후 태종 3년(1403)에는 경상도의 조세를 싣고 한양으로 향하던 조운선 34척이 바다에 침몰하고 배에 탄 백성 천여 명이 목숨을 잃고 조운을 담당하던 선군이 도망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자 태종은 경상도 지역의 조운을 금지하고 경상도 지역의 조세운송은 백성들이 각자 충주 금천(金遷)에 납부하면, 다시 남한강 수운을 이용하여 운송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당시 충주 금천에는 별다른 창고시설이 없었으나 경상도 지역의 조세를 관할하게 되면서 태종 11년(1411)에 창고가 지어졌다. 그 결과 태종 11년에 낙동강과 한강을 있는 충주 금천에 새로이 200여 칸의 창고를 지어 금천창(金遷倉)이라 하고, 충주 인근의 전세뿐만 아니라 경상도 전세도 함께 수납하게 된다. 이후 세조 11년(1465)에 세납처가 가흥창(可興倉)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이 집필한『택리지(擇里志)』에서 “금천은 두 강이 마을 앞에서 합친 다음 마을을 둘러 북편으로 흘러나고, 가흥은 국가에서 여기에다 창을 두어 영남 쪽의 경상도 일곱 고을과 영 북편의 충청도 일곱 고을의 세곡을 거두어 수운판관을 시켜 뱃길로 서울에 실어 나른다. 두 마을에는 과거에 올라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의 집도 많다. 말마리는 심청 김세필이 벼슬에서 물러나 살던 곳으로 자손이 지금까지 대를 이어 살며 민가가 수백 호이고 모두 넉넉하게 산다.” 라는 기록처럼 충주는 경상도와 충청도 조세가 가흥창으로 납부되고, 이를 한강의 수로로 이용해 서울로 수송하면서 크게 번성한 것을 알 수 있다.

2005년 금천창의 실체를 알 수 있는 충주 창동리유적이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확인된 유구는 조선시대 건물지 7동과 기와가마 1기 등이 조사되었으며, 여기에서 `官'자가 찍힌 기와편이 출토되었다. 조사결과 파악할 수 있는 건물지의 전체 규모는 최대 65칸 정도이나 조사지역의 북쪽에 현존하는 축대의 범위까지 포함하여 규모를 산정한다면, 140여 칸으로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창동리 유적의 적심의 축조방식과 주칸거리에서 확인되는 용척의 비율이 조선시대 초기의 건물과 같고 고려~조선전기에 해당하는 기와와 자기들이 대량 출토된 점으로 보아 금천창으로 판단되었다. 이러한 발굴결과로 인해 구전으로 전해온 금천창에 대한 일부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과거 충주는 덕흥창, 경원창, 금천창, 가흥창 등 강안을 따라 많은 포와 진이 형성되어 중부 내륙의 물산이 모이는 물류기점으로 활발한 경제활동이 이루어진 지역이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의 식민지 정책에 의한 경부선 철도를 근간으로 하는 철도망이 완성되고 도로를 이용한 화물수송이 개시되면서 서서히 쇠퇴되었다. 그러나 충북의 관광 인프라를 하나로 집결시키는 초대형 프로젝트인 `충북 레이크파크'가 실현되어 종교, 역사, 문화유산 등이 연계된 국내 최대 관광지가 된다면 충주는 다시 비상할 것으로 기대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