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낮잠
초여름 낮잠
  •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2.06.27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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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만물이 성숙으로 치닫는 철이 여름이지만, 이 성숙의 과정에 사람의 힘이 끼어들 여지는 거의 없다. 그리고 날이 덥다 보니, 사람들의 활동량이 확연히 줄어들고, 심지어 게을러 지기도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봄 가을에 비해 여름의 나날들은 확실히 한가롭다.

송(宋)의 시인 양만리(楊萬里)도 초여름 하루를 낮잠도 자고 하면서 한가롭게 보내고 있었다.


초여름 낮잠에서 깨어나(閑居初夏午睡起2)

松陰一架半弓苔(송음일가반궁태) 솔 그늘 아래 시렁에 기다랗게 이끼가 끼고
偶欲看書又懶開(우욕간서우나개) 어쩌다가 책을 보려해도 또 펴기조차 싫어지네
戱掬淸泉洒蕉葉(희국청천쇄초엽) 재미로 맑은 샘물을 떠서 파초잎에 뿌려 주니
兒童誤認雨聲來(아동오인우성래) 아이들이 빗소리로 잘못 알고 달려나오네


여름의 낮은 무덥고도 길다. 이런 여름 낮 시간을 보내기로는 낮잠만한 것도 없다. 시인은 초여름 낮에 낮잠을 한숨 늘어지게 자고 이제 막 일어났다.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빈둥빈둥하며 두리번대던 차에 소나무 그늘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로 시렁이 하나 얽어져 있었는데, 거기에 얹어 둔 물건은 없고 대신 활의 반쯤은 돼 보이는 길이로 이끼가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동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았던 것인데, 그만큼 일손이 한가로운 여름의 한 단면이다. 책을 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책을 펼치기조차도 꾀가 난다. 머리도 쓰고 싶지 않은 것이다. 책 보는 것을 뒤로하고 대신 놀이거리 하나를 찾아냈다.

넓다란 파초 잎에 물을 뿌리는 일은 시원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여름 놀이로 이만한 게 없다. 물 뿌리기 놀이에 한참 빠져 있는데, 난데없는 일이 일어났다.

어디선가 아이들이 시인 곁으로 달려왔는데, 알고 보니 아이들이 파초 잎에 물 뿌리는 소리를 빗소리로 잘못 알았던 것이었다. 여름의 한가로움을 감각적으로 그려 낸 시인의 솜씨가 탁월하다.

여름은 한가로운 계절이다. 농사일은 물론이고, 번다한 인사는 뒤로 미루는 것이 여름을 지내는 지혜이다. 몸도 쉬고 마음도 쉬고 머리도 쉬고 빈둥빈둥 지내다 보면, 무더운 여름날이 어느덧 선선한 가을날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마음껏 게으르게 지내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적어도 여름에는 말이다.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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