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으로 징검다리 놓는 일
밥으로 징검다리 놓는 일
  • 이영숙 시인
  • 승인 2022.06.1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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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이영숙 시인
이영숙 시인

 

시인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 라는 자문에 평균성으로 매기는 폭력에서 벗어나 각 존재자가 지닌 고유성을 찾으려는 시적 근육을 기본노선으로 갖춰야 한다는 생각이다. 내가 시를 쓰는 이유도 중력에서 벗어난 자력과 자립에 있다. 의식이 건강한 자기로 사는 길은 우리가 시시때때로 바꿔 쓰는 무수한 페르소나를 가급적 최소화하는 길이다.

그러고 보니 가깝게 지내는 문우들도 페르소나 숫자가 적은 편이다. 집을 느닷없이 방문해도 의연히 맞고 식사 때면 냉장고에 있는 반찬 그대로 차려 먹을 정도이니 건강한 자기로 잘 사는 편이다. 한밤중에 불러내도 화장기 없는 민낯에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단걸음에 움직일 수 있는 막역지우들이니 각은 없는 편이다.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 하면 못하는 대로 따뜻한 밥상을 이어가는 사람들, 그런 그들이 풀어내는 글밭의 기본이야 안 봐도 따뜻함이다.

어느 날 유성 떨어진다는 자정에 밥솥 긁어 간단히 볶은 김치, 고추장 멸치 박아 주먹밥 둘둘 뭉쳐 부스스 오르던 상당산성, 돗자리 깔고 나란히 누워 밤하늘의 별자리를 읽던 그 모습은 그대로 동화이다. 느닷없는 시간에 느닷없이 만나 `거친 밥 먹고 물 마시고 팔베개하고 누워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 있나니 의롭지 않게 얻은 부와 명예는 내게 뜬구름'이라는 공자의 삶이다. 밥이 하는 역할은 형언할 수 없다. 어떤 곳이든 밥이 있는 곳엔 사람의 진한 온기가 있다.

내륙문학회 시분과 모임에서 6월 합평 텍스트로 문동만 시집 『설울 일 덜 생각하고』를 선정했다. 시집은 다른 문학작품과 달리 고난도 입체적 독해가 필요한 분야라 간단히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파트 내 도서관에서 집중 읽기를 마쳤다.

시집을 덮고 나니 <밥이나 하라는 말> 시가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삼십 대 초반 갓 운전면허를 취득한 후 빨간 승용차를 타고 다닐 때 몇 번 들었던 말이다. 그래서 어떤 여성 운전자들은 자동차 뒤편에 <밥해놓고 나왔수>라는 문구를 붙이기도 했다. `밥이나 하라는 말'의 의미는 `여자가 무슨 운전이냐'를 내포한 빈정거림일 것이다. 그 밥의 의미가 개념적으로 얼마나 큰지 모르고 `밥이나 하라'는 식으로 폄하하니 문 시인이 시집 앞장에 배열한 이 시로 충분한 일침이다.

밥 차리러 가는 당신 때문에/나는 살았다/흙 묻은 손으로 씻어준/알갱이들 때문에/

밥을 차리러 간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가까스로/이어가며 살 수 있었다/

쌀을 구하러 손발이 닳던 노동 때문에/화구에 불을 넣고 연기를 쬐던/주름진 노역 때문에/

-중략-

그러니/들어가 밥이나 하라는 말은/쉰밥만도 못한 말/밥을 버리라는 말/밥의 자식이 아니라는 말/

불내의 식구가 아니라는 말//

-문동만, 「밥이나 하라는 말」 부분

시인의 말처럼 우린 밥의 자식들이다. `밥'이라는 말을 능가하는 따뜻한 단어가 또 있을까. 밥은 정을 잇는 징검다리다. 삶 가운데 그 징검다리 놓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밥을 함께 하는 일, 누군가를 위해 밥상을 차리는 일은 불내의 식구가 되는 일이며 서로의 삶을 잇는 일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밥이나 먹자'는 약속을 허투루 하진 않는다. 밥 먹자는 말은 곧 신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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