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송
노송
  • 박명자 수필가
  • 승인 2022.06.08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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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자 수필가
박명자 수필가

 

빠른 시일 내에 재검을 받으라고 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다. 몇 년째 투병 중인 남편을 따라 병원 출입이 잦은 나는 지레 겁을 먹었다. 울적한 마음을 알아챘는지 남편이 바람 쐬러 가자고 했다. 4차선 넓은 길을 한참 달려 조붓한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낯익은 풍경이 창밖으로 스친다. 차가 멈춘 곳은 경북과 충북의 접경지역이 가까운 경계선 부근이다. 대를 이어 농사짓던 우리 밭 옆에 수려한 노송이 서 있다..

나를 향해 손짓하듯 바람이 인다. 뺨을 스치고 코끝으로 전해진 진한 솔향에 그리움이 묻어난다. 오랜만에 할머니를 만난 것처럼 푸근하다.

4백 년 넘는 세월을 이곳을 지킨 노송은 서쪽으로 굵은 가지를 뻗어 볕을 가렸다. 더위에 지친 이들이나,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쉬어가는 쉼터였다. 그늘이 어찌나 넓은지 쇠기둥 세 개가 나뭇가지를 받치고 있다

노송 앞에서 세 갈래의 삼거리를 바라본다. 그 길은 각기 다른 이유로 사람들이 오간다. 냇물을 건너 깊고 높은 산길을 따라 은티재를 넘으면 충북 땅 연풍으로 이어진다. 조붓한 언덕길은 단지장골로 가는 길이다. 마을로 내려가는 넓은 길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에 잠들었던 기억들이 하나 둘 살아난다. 꾹꾹 눌러 애써 외면했던 알싸한 느낌의 그리움도 소리를 낸다.

노송은 알고 있다. 아버지의 외면으로 시린 속을 달래며 힘든 날을 견디다 끝내 어린 자식을 숙모께 맡기고 은티재를 넘어 떠나야만 했던 엄마의 속울음을. 돌 지난 아기가 밤낮없이 울고 떼를 쓸 때, 젊은 숙모는 달빛 아래서 아기와 함께 울던 밤들을, 할머니와 숙모가 밭일할 때면 노송 아래 멍석이 깔리고 아이는 놀다 바람결에 잠이 들곤 했다. 채워지지 않던 허기에 늘 외롭던 아이, 할머니는 밤마다 그 아이를 꼭 안아주셨다. 적삼에 밴 땀 냄새가 우안이 되었던 기억들….

“할매, 나는 왜 엄마가 없어?”

“단지장골 밭에 홍시 따러 갔어. 곧 올 거여.”

홍시를 들고 돌아올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곳, 그곳을 내가 황망한 마음으로 돌아오던 때가 있다. 그때 일이 어제 일인 듯하다.

아버지 집으로 보내진 지 2년, 섬처럼 막막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할머니의 위독함을 알리려 고향에 사는 고모부가 왔다. 나를 데리고 서둘러 출발했지만, 연풍에서 차가 끊어졌다. 고모부는 은티재를 넘어가야 한다고 했다. 달빛이 환히 비추는 산길로 접어들자 산짐승 울음소리에 무서움을 넘어 공포에 휩싸였다. 등이 흥건하고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고모부 손을 꼭 잡고 냇물을 건너고 은티재를 넘었다. 할머니를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걸음이 빨라졌다. 밤이 깊어서야 등을 환하게 밝혀둔 고향 집에 도착했다. 무심히 나를 바라보던 할머니는 다음 날 하늘에서 나를 지키는 별이 되셨다.

노송은 말이 없을 뿐이다.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담장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애환과 경사도 알고 있다. 좋아도 너무 달 뜨지 말고, 아파도 너무 속 끓이지 말라고, 견딜 만큼의 몫을 주며 겪을 만큼 겪어야 지나간다고 일러준다. 남편의 표정도 밝고 환하다. 울적하던 내 마음도 어느새 편안하다. 누구나 찾아와 위로받고 씩씩한 걸음으로 돌아가는 곳 우리 부부도 가벼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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