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재(不在)
나의 부재(不在)
  •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2.05.18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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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룡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집사람이 묻는다. 당신 없어도 학교는 잘 돌아가? 물론이지. 서운하지 않아? 서운할 나이는 지났지. 나 없이도 세상이 잘 돌아가면 서운해 할거야?

마르크스는 인간 존재 의미는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서 찾아진다고 말한다. 나는 친구의 친구이며 부모님의 자식이며, 아내의 남편이고 애들의 아버지이며, 동료의 동료이고, 상사의 부하이고 부하의 상사로 살아간다. 그런 관계들을 하나씩 제거하면 무엇이 남을까? 나는 누구의 친구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고, 남편도 아니고, 선생도 아니고, 상사도 아니고, 부하도 아니고 애완견의 보호자나 소유자도 아니고 등등, 다 제거하면 무엇이 남을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대답이다. 대상이 있음으로써 내가 있고 나는 다른 대상과 함께 있음으로써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홀로 있는 존재? 그런 건 없다. 마르크스는 그래서 외로운 섬과 같은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간은 항상 다른 사람이나 환경과 어울려 살게 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역사적 존재이다. 모든 것과 분리되어 사는 인간은 허상일 뿐이다.

서구의 전통 사상가들은 그 허상이 실제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곧 모든 것과 분리되어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개인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소피스트, 소크라테스로부터 유래하는 개인주의적 전통이다. 개인이 먼저 있고 그리고 그 개인들이 모여서 사회를 구성하고 산다는 것이 서구의 전통사상이다. 마르크스는 이에 반발하여 섬과 같은 개인은 인간의 본래적인 상태를 저버림으로써 나타난 병적인 소외(疎外, Entfremdung) 상태라고 본다. 그럼 서구의 전통사상가들은 환자들이 된다.

인간의 삶이 관계 속에서 유지될 수 있다는 마르크스의 말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한참을 살다 보니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회 속의 일원, 동료와의 관계, 가족의 일원이 됨으로써 찾을 수 있는 삶의 의미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생긴다. 곧 나의 부재에 대한 느낌이다. 살아가는 데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필요하다. 곧 나의 존재를 전제로 하면 타자가 필요하지만 나의 부재(不在)를 전제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내가 없으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군대 가서 죽도록 고생하고 첫 휴가를 나와 역에 내렸을 때 깜짝 놀랐다. 내가 없었는데 세상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분명히 내가 없으면 세상이 그 부재만큼 뭔가는 달라져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내가 없는데도 세상이 예전처럼 돌아가고 있는 거지? 사람들의 일상은 한두 사람의 부재 정도는 두꺼비 파리 잡아먹듯이 꿀꺽 삼키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돌아간다. 서운함을 넘어서 충격이다. 그래도 군 입대로 사회에서 사라진 사람은 군 조직에서 새로운 역할을 하며 산다. 여전히 그는 다른 관계 속에 들어가 산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마르크스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어떤 관계든 편입되어 살 수밖에 없으니까.

세상에서 없어지는 경우는 어떨까? 새로운 관계 속에 편입된다는 보장이 있을까? 없다. 내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더불어 살아야 의미가 찾아지는 삶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아무도 나의 대상으로 있지 않으며 나도 어느 누구의 대상적 존재로 있지 않을 수 있다. 아니, 아예 나 자체가 없어질 수 있다. 나도 없고 대상도 없는 완전한 소외상태가 초래될 수 있다.

나의 부재는 모든 관계의 단절 가능성을 함축한다. 그리고 이런 가능성은 나의 존재(存在)를 전제로 하는 철학으로는 풀 수 없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건 삶을 전제로 한다. 나의 부재에 관한 문제를 풀 때는 불필요한 전제이다. 나의 부재 문제를 풀 때는 세상에 어쩔 수 없다는 전제가 사라진다. 나의 부재를 생각하지 않은 사람은 나 없이 세상이 잘 돌아가면 서운할 것 같거나 세상을 떠나는 게 두려워진다.

어렵다구? 죽음도 고민해보라는 말이다.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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