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천고에 안중근 의사 옥중 유묵을 전시하며
금천고에 안중근 의사 옥중 유묵을 전시하며
  •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 승인 2022.04.2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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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안중근 의사 옥중 유묵은 안중근 의사께서 1909년 10월 26일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한 후 서거하시기까지 뤼순 감옥에서 남긴 한문 휘호들이다.

안 의사의 유묵은 총 200점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안중근 의사 기념관 측은 57점만을 진본으로 인정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개인적인 처지로 인해 모든 유묵을 일본인에게 남겼는데, 이 가운데 26점이 대한민국에 반환 또는 인도되어 `보물 569호~00' 안중근 의사 유묵으로 지정되었다.

안중근 의사 유묵 가운데 어이없게도 분실된 것도 있어 안타깝다.

1점은 청와대에서 보관하다가 분실된 `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치악의악식자부족여의)'와 또 1점은 `日韓交宜善作紹介(일한교의선작소개)'은 한국인이 만든 일본 도쿄에 있는 국제한국연구원에 일본인이 기증하였는데 연구원 측에서 관리 소홀로 분실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휘호마다 `大韓國人 安重根'이라는 서명과 함께 무명지 한마디가 잘린 자신의 왼손바닥에 먹물을 묻혀 찍어 낙관을 대신하였다. 안중근은 32살의 젊은 나이에도 글씨마다 그의 힘과 기개를 느낄 수 있는 엄청난 명필이다. 사형선고를 받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형수가 아니라 `동양평화'를 염원하는 인류의 지도자로서, 그리고 `천국을 소망'하는 기독교 신자로서 죽음 따위는 초월한 신앙인으로서 존경받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한글자 한글자 써 내려간 글귀들의 붓끝에서 느껴지는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은 유묵의 내용과 글씨를 쓰던 당시 상황까지 겹쳐 “안중근의 유묵은 값을 매겨 평가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금천고에 `역사위인 지혜의 숲'이라는 공간을 만들었다. 이순신 장군의 친필과`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는 상소문, 그리고 윤봉길 의사의 선서문도 서각해 전시를 하였다. 특별히 안중근 의사의 유묵은 실제 유묵의 크기로 서각해 전시했는데 다음과 같다.

1.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보물 569-2호)

2. 인무원려 난성대업(人無遠慮 難成大業) 멀리 앞을 내다보지 않으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렵다.(보물 569-8호)

3. 세한연후 지송백지부조(歲寒然後知松栢之不彫) 해가 춥고 난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보물 569-10호)

4. 제일강산(第一江山) 제일가는 강산. (보물 569-14호)

5. 박학어문 약지이례(博學於文 約之以禮) 글을 많이 배우고 예로서 요약한다.(보물 569-13호)

6. 인지당(仁智堂) 어질고 지혜로운 집.(보물 569-17호)

7.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 국가의 안위를 위해 애쓰고 걱정하다.(보물 569-22호)

8. 언충신 행독경 만방가행(言忠信 行篤敬 蠻邦可行) 말이 성실하고 신의가 있으며 행실이 돈독하고 경건하면 오랑캐 나라에서도 제대로 행할 수 있다.(보물 569-25호)

아울러 안중근 의사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의 편지글도 전체를 서각해 전시하였다.

안중근 의사 서거 112주년인 지난달 26일에 학생들이 직접 이 공간의 이름을 짓고 설명도 만들었다. 역사 교육의 장소로 활용하며 다양한 활동도 계획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인류를 향한 평화의 정신과 나라와 민족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학생들에 전해지길 바란다. 모든 학생이 안중근 의사처럼 공부해서 남 주는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히스토리 메이커들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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