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서는 날
일어서는 날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2.03.29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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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봄비가 연이어 땅을 찾았다. 봄비의 효능이 탁월한 탓인가? 녹색 융단이 펼쳐졌다. 예상했지만 불청객의 경쟁적 존재 과시다. 바늘처럼 뾰족한 새순에서 일찌감치 손바닥만 한 잎이 장악했다. 바늘처럼 뾰족한 순은 올해 발아한 녀석이고, 손바닥만 한 녀석들은 지난해 발아해 뿌리를 적당히 내리고 기다리던 녀석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녀석들이다. 환삼덩굴 순은 두 갈래로 펴고 영토 확보의 레이더를 돌리고, 솜털에 지나친 공을 들인 박주가리 씨앗은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땅따먹기를 위한 치열한 눈치 보기다. 지금부터 풀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무릎에 좋지 않다는 쪼그려 앉기다. 한 손엔 뾰족한 날의 호미, 옆엔 커다란 양동이가 들렸다. 초록으로 보이는 건 호미 날 끝에 영락없이 걸려 제거된다. 언 땅에서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있던 개망초, 곰보배추, 가녀린 뿌리를 흙에 살짝 걸치고도 생명을 유지한 나도냉이 등 초록이 들이다. 안쓰럽지만 번식력이 워낙 강해 잠시 주저했다가는 제압이 불가한 녀석들이다. 초록이 사이에서 유독 붉은 순이 올라왔다. 새침하게 순을 일으켜 세움에 몰두한 녀석, 이제 제법 꼿꼿하게 일어선 대견스러운 녀석이다.

지지리도 못생긴 검정 알맹이에서 짙은 갈색 땅으론 흰색이, 파란 하늘론 붉은색을 트였다. 흰색의 뿌리는 지난해 된 서릿발 성성한 겨울 이전에 내렸다. 진즉 뿌리를 내렸지만 붉은 순은 올리지 않았다. 땅속 깊숙이 순을 감추고 지난한 겨울을 무던히 견디며 땅속으로만 뿌리를 내린 것이다. 흰색의 잔뿌리는 짙은 갈색의 흙 안에서 서릿발 뻗듯 뻗었다. 검은 씨앗에서 갓 내린 녀석이나 다년간 뿌리를 더한 녀석이나 한결같았다.

태생이 풀인지라 해를 거듭하면서도 줄기를 굵게 하지 못했다. 단지 뿌리에 정성을 들였다. 검은 알맹이에서 일으켜 세운 붉은 순은 세상과 더불어 초록으로 변했다. 그렇다고 온전히 초록으로 변하진 않았다. 기나긴 세월 땅속의 양분으로 올린 붉은 순의 흔적을 간직했다. 초심을 붉은색 잎맥과 잎자루에 간직한 초록이었다. 그리고 햇살이 작열하기 시작하는 날, 목단 꽃잎이 마지막 떨구는 날 녹색의 꽃대를 올렸다. 꽃 몽우리를 달았다. 꽃 몽우리를 다는 그 순간까지도 붉은 순의 색이 함께했다. 햇살은 더 강해지고 꽃 몽우리를 감싸 안은 녹색의 잎이 열린다. 작열하는 태양에 뒤질세라 더없이 강렬한 색을 터트린다. 잎맥에도 줄기에도, 잎끝에도 붉게 색을 띠고 있었던 것이 괜스럽게 보이지 않는 강렬함이다. 그 옆으로 수줍게 연분홍의 홑꽃잎도 더한다. 그리고 한 술 더 떠 황색을 띠는 깊은 노란 꽃술은, 개미 더듬이인 듯 붉은 립스틱을 바른 듯 수줍은 암술로 모여 열광을 한다.

작열하는 태양의 기세가 등등할 때 꽃잎을 떨구었다. 그리고는 녹색의 꼬투리를 달았다. 시간의 더함에 꼬투리는 녹색에서 옅은 갈색에서 짙은 갈색으로 변했다. 갈색의 짙음이 극에 달했을 때 꼬투리를 열었다. 찌질 못생긴 검은 알이 맺혔다.

검은 알맹이에는 갈색에 기대는 흰색이, 파란색을 바라보는 붉은색이, 녹색의 세상과 함께하는 녹색이, 붉은색의 품 안에 노란색을 품었다. 변변하게 번지르르하게 생기지 못했지만, 인간의 지혜를 관장하는 검은색을 가졌다. 그래서 흰색을 만들고, 붉은색을 만들었다. 세상을 만나 함께 녹색으로 변했고, 창대한 분홍색을 노란색을 빨간색을 드러냈다. 그리고 끝내는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작약은 풀이다. 뿌리에 영양을 저장한다. 뿌리를 캐기 전에는 몰랐다. 해를 거듭하며 키운 뿌리는 어른 장딴지, 알통을 가졌다. 뿌리를 키워 검은 열매를 매년 만들어 냈다. 끊임없는 나누기를 펼쳤다. 결국, 한 뿌리에서 나온 씨앗이 온 세상을 작약으로 채웠다. 곱하기가 되었다.

풀이 일어서는 날 나누기는 곱하기가 되었다. 지혜로운 검은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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