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종할 권리
복종할 권리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2.03.22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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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서로를 견제하는 손이 일촉즉발이다. 남편은 한 번 만져보자고, 먹구는 어디 건드리기만 해보라고, 팽팽한 신경전이다. 먹구는 올해 5살 암컷 고양이다. 물론 중성화수술은 했다. 한쪽 눈은 실명이고 청력도 상실했다. 그러다 보니 예민한 성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태어난 지 두 달쯤 되었지 싶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느 날 어미 길고양이가 우리 집 발코니에 버리고 갔다. 살 가망이 없으니 아마도 어미가 포기했을 것이다.

작은 딸아이와 나는 새끼 고양이를 안고 동물 병원으로 달렸다. 머리가 온통 고름으로 범벅이 된 새끼 고양이를 보자 수의사는 바로 응급처치에 들어갔다. 한쪽 눈은 적출을 하고, 머리 위로 부풀어 있던 고름은 짜내고 약을 발라 주었다. 수의사는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처방약을 건네주고는 걱정의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먹구는 다행히도 건강한 고양이로 이때껏 잘살고 있다. 물론 장애를 안고 있어 모든 것이 불편할 수도 있으나 우리가 보기에는 우리 집 상전의 노릇을 톡톡히 하는 중이다. 먹구를 만지고 쓰다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딱 두 사람이다. 나와 작은딸 뿐. 자신을 살려 준 사람들은 어찌 그리도 잘 아는지 영민하기가 그지없다.

하지만 남편은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 오랜 세월 함께 지냈으니 이제는 선뜻 몸을 내주고 만져주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하기야 반질반질 윤이 흐르는 먹구의 털은 우리집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만져보고 싶어 한다. 그러니 남편의 원성도 틀린 말은 아니다.

어느 날은 내 옆에서 곤히 자는 먹구를 만져 볼 양으로 남편은 얼굴을 딴 곳을 향하고 슬그머니 먹구 등을 더듬었다. 그 순간 섬광 같은 속도로 먹구의 발이 남편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남편은 꽤나 놀란 듯했다. 안 되겠다 싶었던지 어디서 효자손을 가져 와서는 먹구 앞에 들이밀었다. 위협이라도 해서 굴복을 시키겠다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나의 만류에도 남편은 강하게 보여야 자신에게 복종할 것이라며 먹구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어디 먹구가 질 쏜가. 크악크악 소리와 함께 온몸의 털을 부풀리고는 공격 태세를 취하는 모습에 겁을 먹은 건 되레 남편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편은 먹구를 만져보려 애를 쓰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먹구 또한 한 치의 양보도 없으니 곁에서 보는 나만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다.

나는 남편에게 먹구가 당신에게 `복종'하기를 바라지 말고, 서로를 인정해 주는 `공존'의 방법을 찾으면 안 되냐고 했다. 남편은 사료도 대주고,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키워주고 보살펴 주는 것이니 복종을 시켜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논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리 작은 동물이라지만 내가 보기에 먹구 만큼 똑똑한 아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집안을 어지르는 법도 없다. 눈이 잘 안 보이니 높은 곳에도 올라가지 않는다. 그리고 먹구를 잘 관찰해 보면 먹구의 모든 행동은 생존의 전략으로 보인다. 들을 수도 잘 보이지도 않으니 확실하게 안전한 사람에게만 다가가는 것이다.

우리가 미물이라고 여기는 동물인 먹구도 저렇듯 의견이 명확한데 하물며 사람은 어떠할까. 약자의 의견을 들어주고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여 주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순종하고 복종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분명 우리의 앞날은 희망이 넘치는 사회가 찾아오리라 본다. 누군가 봄은 고양이라고 했다. 털은 더욱더 부드러워지고, 짝을 찾는 사랑의 세레나데로 발걸음은 점점 분주해지고 시끄러울 것이다. 모든 생명의 시작점, 부디 먹구와 남편에게도 따뜻한 이 봄이 화해의 계절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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