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히는 날
가라앉히는 날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2.03.15 18: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밤사이 비가 온다는 말에 잠을 설쳤다. 창문을 닫아 잘 들리지도 않는 빗방울 소리를 들었다. 비가 오고 있었다.

가로등 밑으로 줄기가, 돌확 안으로 물결이 일고, 감나무 가지에는 방울이 매달렸다.

자정을 넘어 어두운 밤, 감나무 가지에는 가로등 불빛을 받아 영롱한 구슬을 달았다.

가끔 작은 바람에 흔들렸고, 심술궂은 바람에 떨구었지만 바로 달았다. 명자와 매화는 꽃망울을, 감나무는 빗망울을 달았다.

가로등 불빛이 새소리에 시간을 건네는 아침에도 비는 땅을 찾았다. 애타게 찾는 이들이 많으니 거쳐야 할 것들이 많았다. 새벽 나뭇가지 끝에 걸쳐 아침이 되어서야 땅에 다다랐다.

그대로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메마른 감나무 가지를 거치고 공연히 부는 바람에 흩날리며 땅을 적시었다. 비는 추락하면서 뜬 색을 가라앉혔다. 명도를 낮추고 본연의 고색을 찾게 해 주었다.

마늘 싹이 제법 올라왔다. 못줄을 띄워 모내기를 갓 마친 듯 빠진 데 없이 자리를 잡았다.

다년간의 시도 끝에 올해는 제법 튼실한 싹을 보게 되었다. 비대한 마늘쫑을 품었다. 보온을 위해 덮어 두었던, 바스락거리며 바람에 이리저리 갈팡질팡 못 하던 낙엽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기온이 오르며, 비가 오니 싹이 올라온 탓도 있겠지만 들떠있던 낙엽들이 차분해지니 확연히 돋보이는 마늘 싹이다. 채도를 높이고 제법 당당함을 찾게 해주었다.

잠시 비가 그친 틈을 타서 흙을 고르고 씨앗을 넣었다. 잘 발효된 퇴비를 부족함 없이 펴고 뒤집어 둔 흙이다. 오랜 가뭄에 삽으로 뒤집는 내내 흙먼지를 풀풀 내던 땅이, 호미가 필요치 않은 보드라운 흙이 되었다. 완두콩, 치커리 등 갖가지 쌈 채소의 영역을 나누고 각각의 씨앗 굵기에 맞춰 파종 깊이를 달리했다. 퇴비가 섞인 흙은 비가 오고서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짙은 갈색의 색상을 살리고 포근하게 받아 품었다.

비가 내리는 내내, 한낮이면 여린 꽃잎을 활짝 열어젖히던 복수초는 다소곳하게 닫았다. 함초롬 꽃망울을 올리고 꽃을 피우지 않았던 듯 새침을 떤다. 수줍은 붉은 색의 함박꽃 순이 옆자리가 있음을 알린다. 비를 맞아 머위 대공의 대찬 모습은 겨울 추위 언 땅에 대적한 기세등등함이다.

영원한 것은 없기에 희망은 있다. 비는 인간의 의지만으로 할 수 없는 한계를 일러준다. 자신보다 낮다는 이유로 공연히 괴롭히거나 무시하거나 하지 않는다.

두루두루 어루만지고 본연의 색을 찾도록 해준다. 편협된 길을 내어 무게로 강압하지 않는다. 땅에 이르러서야 방울이고 줄기가 된다. 그러고는 조용히 스민다.

지난한 여정 비에 기댄다. 비가 내리는 시간에 기댄다. 그러며 가라앉힌다. 가라앉는다.

연립주택 앞 깨진 벽돌과 부서진 시멘트 덩어리, 드문드문 자연석을 고루 채워 쌓은 텃밭(?)에 한 노인이 쭈그리고 앉았다.

연식이 꽤 된 호밋자루를 들고 흙을 고르고 있다.

같은 연립주택에 사시는 분인 듯 지나며 한마디 던진다. “비가 오는데 뭐해?” 우산도 없이 호미를 쥐고 땅을 고르던 할머니가 대꾸한다. “심어야 먹지” 할머니는 알고 있다. 평균기온이 파종 시기가 되었다고 골을 타지 않았다. 비가 오고 충분히 발아를 시킬 조건이 되었으니 씨앗을 뿌렸다. 촌로로 살아온 오랜 시간, 도시로 나와서 공간이 바뀌어도 때를 아는 것이다. 비가 와야 씨앗을 뿌린다는 것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