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엎는 날
바람이 엎는 날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
  • 승인 2022.03.01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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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

 

때아닌 태풍이 상륙이라도 하는 걸까? 갑작스런 바람에 둥구나무가 휘청거린다. 중심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바람이다. 빽빽한 가지 사이를 뚫고 지나며 내는 소리까지 무섭다. 운동장 한쪽에선 돌개바람에 나뭇잎과 흙먼지가 공중부양이다.

높은 곳에서 휘젓던 바람은 바닥으로 내려왔다. 먼저 타격대상은 마늘밭이다. 마늘밭을 덮고 있던 비닐을 헤집기 시작했다. 겹겹으로 덮은 비닐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풀피리 불 듯 야무지게 파고들었다. 중간의 비닐은 패러글라이딩 날개를 만들어 공중으로, 가장자리 무거운 돌에 괴인 비닐은 깃발 날리듯 펄럭거리며 떨고 있었다. 비닐 윗부분에 얹어놓은 낙엽은 온데간데없다. 순식간에 일어난 공격에 무릎 높이의 작은 비닐하우도 부르르 떨고 있다. 행여 비닐이 벗기어 날아갈까 살대에 바짝 달라붙었다. 눈은 뻑뻑하고 입안에서는 흙먼지가 씹혔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에 웬 날벼락인지? 한동안 그렇게 바람은 난리를 치고 있었다.

늦은 오후가 돼서야 바람이 잦아들었다. 잠시의 거센 바람은 언제 그랬나 싶은 정도로 고요해졌다. 여기저기 바람이 지난 흔적이 남았다. 벗겨진 비닐은 다시 정갈하게 덮어 주고, 넘어진 짚풀 바람막이는 지지대를 더해 세웠다. 바람에 생채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덕분에 겨우내 잔가지 끝에 버티고 매달려 있던 나뭇잎들을 떨어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새싹을 올려야 할 느티나무에 덜떨어진 녀석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누구의 미련인지는 모르겠으나 추운 겨울, 가지 끄트머리에 달렸던 녀석들이다. 보온을 위해 덮어 두었던 감나무 잎도 한곳으로 몰았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듯 풋내가 물씬 나는 싹을 등장시켰다.

겨울에 눈비를 맞고 삭으며 잦아들어야 할 녀석들이 높이를 더하고 있었다. 겨울 가뭄에 건조한 날씨 탓에 낙엽의 부피가 불어난 것인가? 바람이 지난 후 알았다. 낙엽 밑에서 겨우내 숨죽이고 있던 싹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뾰족한 수선화 싹은 나뭇잎을 뚫고, 둥그런 상사화 싹은 일제히 무겁게 누르고 있던 낙엽을 올리고 있었다. 겨울의 추위에 지친 게으른 정원사를 나무라듯 바람은 호되게 흐름을 엎었다. 그렇게 바람이 지난 자리에 싹들이 자리했다. 크로커스, 수선화, 튤립, 상사화 등 알뿌리를 가진 녀석들의 등장이다. 덩달아 마늘도 싹을 올렸다. 눈을 녹이며 핀다는 복수초는 몽우리를 펴지 않았다. 또 불어올 바람에 행여 얇디얇은 꽃잎이 찢어질세라 아직 열지 않았다. 그믐이니 보름 후 달이 휘영청 밝은 날에 맞춰, 봄을 환영하는 영춘화와 매화는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바람이 힘을 다한 곳에 낙엽이 무척이나 많이 쌓였다. 겨우내 추위를 녹이던 길고양이의 명당자리에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 주변의 움직임에 아랑곳하지 않고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던 길고양이가 자리를 찾았다. 잠시 자신의 마른자리가 바뀐 걸 의식한 듯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바로 엉덩이를 디밀고 부비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드센 바람이 널려 있던 낙엽을 몰아주었으니 바닥이 더 푹신푹신 해졌을 것이다. 그렇게 잠든 길고양이는 오랜 시간 잠에 취했다.

바람골도 아닌데, 정체도 없는 바람은 바싹 마른 낙엽을 부대끼며 소리를 냈고 공연히 비닐을 잡아 흔들어 산만하게 굴었다. 낙엽을 이리저리 옮기고 때론 스티로폼 상자를 통통 굴리며 힘을 과시했다. 잘 마르던 빨래를 이리저리 뒤집고 돌돌 말았다. 삭은 걸 알지만 아까워서 교체하지 않은 빨래집게가 빨래 안에서 부스러졌다. 바람을 탓하는 건 아니다. 바람은 불고 싶어서 불었겠는가? 제때 교체하지 않고 치우지 않은 내 불찰이지.

왜바람은 다져진 길을 따르지 않는다. 걷잡을 수도 없다. 많은 것이 바람의 피해로 남루해졌지만, 여전히 할 일을 하고 있다. 가끔은 구수한 가마솥 누룽지밥 냄새를 날아다 주는 감미로운 바람을 위안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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