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 쬐는 날
볕 쬐는 날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2.02.15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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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저녁 느지막이 아궁이에 불을 지폈는데 방고래가 막힌 것인지 새벽이면 빨리 식었다. 할머니가 주무시는 아랫목 이불 밑으로 손을 조심스럽게 찔러 넣는다. 아랫목은 아직 따듯하다. 한지 문풍지에 반쯤 가려진 유리 밖으로 마당을 내다본다. 밤새 내리던 포슬눈이 멈춰 있었다. 바람에 팔랑댔는지 안채 마루 깊숙이 들었다. 촘촘히 맨 갈대비로 쓸어내니 팔랑대며 댓돌로 내려간다. 삐거덕거리는 부엌문을 여니 엄마는 밥 짓는 솥에 조리로 쌀을 안치고, 아버지는 장작을 옮기고 계셨다. 아궁이 앞에 있는 누이 옆으로 앉았다. 성근 나무문 위 살광창으로 볕이 들었다. 누이는 자리를 내주었다.

계절의 냄새가 달라졌다. 햇볕이 깊게 든다. 안채 뜨락 마루 틈 사이에 백구가 널브러져 누웠다. 코앞으로 번질나게 드나드는 고양이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난해 새끼들한테 빨리던 젖꼭지를 드러낸 채 다리를 쩍 벌리고 누웠다. 인기척에 가끔 귀만 쫑긋댈 뿐이다.

세 형제가 흙 담벼락 아래 일렬로 서 있다. 어깨너비보다 좁게 다리를 벌리고 머리는 적당히 뒤로 젖혔다. 눈꺼풀은 나른함에 겨운 듯 눈동자에 무겁게 얹혔고 손은 다소곳하게 모았다. 팔은 축 늘어진 듯 미동도 없다. 그러다 아무런 신호도 없었는데 셋은 약속이나 한 듯 뒤로 돌아선다. 아! 등이 따습다. 등짝이 따습다.

긴긴 겨울 버들강아지 꽃눈의 솜털은 한올 한올 곧추세웠다. 얇은 겉껍질을 벗어낸 솜털은 묵은 목화솜을 솜틀 집에서 갓 탄 듯하다. 잔털이지만 꽃눈의 크기를 한껏 부풀려 보인다.

세 형제는 버들강아지 흐드러지게 피는 먹바위골로 쏘다녔다. 말 형상을 한 먹 바위를 찾아 올랐다. 커다란 말 형상의 높지막한 바위, 조랑말을 닮은 나지막한 바위를 찾아 올랐다. 벅차게 뛰는 심장의 박동과 따습게 내리쬐는 볕은 끊어진 모세혈관을 잇고 확장시켰다. 이 바위 저 바위 옮겨 타다 지치면 너럭바위에 누웠다. 등은 시원한데 가슴은 더웠다. 팔을 벌려 세 형제 가슴팍 위에 서로 걸터 놓았다. 아! 따습다. 가슴이 터질 듯 따습다.

집에 오는 내내 즐거운 소리를 내며 연신 소란스러웠다. 그리 뛰어다니고 힘에 부쳤는지 툇마루에 큰대자로 누웠다. 긴 긴 겨울의 끝, 봄이 오는 여백에 색감과 질감을 즐긴다. 무심하게 툭툭 던지는 의미 없는 소리, 그사이에 움직임이 좋다. 마루에 누워 서까래를 바라보다 가끔 미소 지으며 잔잔한 여운을 느끼던 세 형제의 어느 겨울 끝자락이다.

벌써 굴뚝의 연기는 온 집안을 감싸고 있다. 잔 군불에 고구마라도 구워 먹을 양 부엌으로 향했다. 광 창으로 서산을 넘는 애잔한 볕이 회색 연기에 색을 넣어 비집고 든다. 누이는 자리를 바꿔 앉고 부지깽이로 불을 앞으로 끌어내어 준다. 아! 좋다. 얼굴이 따습다.

포슬눈 오는 날은 하늘과 바람과 땅이 만나는 날이었고, 눈이 멈추고 온종일 내리쬐는 볕은 흙담벼락이 돋을 양지가 되는 날이었다. 볕은 고요하나 강렬했다. 두꺼운 얼음 밑부터 녹였다.

아직 겨울이다. 어릴 적 세 형제의 기억을 소환한들 봄은 먼데 겨울이 끝날 리 없다. 조건이 맞지 않으니 씨앗 또한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죽은 것은 아니다. 때를 기다린다. 무던히 참고 견디는 것이다. 자연의 시간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깊은 준비가 있어야 변화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너무나 긴 겨울이다. 늦은 밤 개울 물 얼음 밑 물소리가 들릴 법한데 아직 소리가 없다. 흐르는 개울 물 둥둥 떠내려오는 달빛은 언제나 보려나? 바라지창으로 드는 볕이 아니어도 좋다. 볕뉘 한 줌 담아 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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