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속도
행복의 속도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2.02.02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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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아침이 늘 바쁘다. 서른 해가 되도록 나의 출근 준비는 종종걸음이다. 매일 서둔다고 해도 앞당겨지질 않는다. 굼뜬 주인 덕에 숨차게 달려야 하는 애마인 아반떼만 고생이다. 직장이 멀어지면서 고약한 버릇이 생겼기 때문이다.

4차선 도로에서의 제한속도는 80㎣이다. 머리로는 알지만 과속을 한다. 한 해전만 해도 차로 십분 거리였지만 네 배로 늘었다. 먼 거리는 나도 모르게 속도를 내게 한다. 계기판이 110㎣일 때가 다분하다. 내 몸에 배어있던 천천히는 어디로 가고 운전대에만 앉으면 헐크가 된다.

단속카메라 앞에서 급히 브레이크를 밟는 일은 예사다. 속력을 낼수록 마음은 더 급해져 앞의 차가 천천히 가면 안달이 난다. 안전거리도 무시한 채 바짝 들이대며 피해 달라는 무언의 압박을 보내는 것이다. 도로 위의 폭력이 따로 없다. 왜 이렇게 폭군이 되어가고 있는지.

빠른 속도는 옆을 돌아볼 여유를 주지 않는다. 시간을 잊고 살다가 바람이 차 안으로 들여보내는 아카시아 향기에, 어느 날 문득 물들어가는 산의 단풍을 보고 놀란다. 길가에 나무를 보며 사계절이 주는 자연을 느끼던 때가 아득하다. 노을의 아름다움에 취해 차를 세우고 바라보던 적이 있었는지조차 까마득해져 온다. 지나간 일들은 다 멀게만 느껴진다.

행복의 속도라는 붓카들의 삶을 조명한 영화가 TV에 소개되는 걸 본 적이 있다. 붓카는 해발 1500미터 오제국립공원에서 산장까지 짐을 나르는 사람을 말한다. 80㎏의 무거운 등짐을 지고 12㎣를 걸어서 묵묵히 맡은 일을 한다. 매일 똑같은 길을 걷는 그들에겐 그 길이 그 길일 것 같다. 아마도 나라면 금방 지쳐 쓰러졌을 것이다. 땀을 비 오듯 흘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들. 그러나 한 번도, 단 1초도 같은 날이 없다고 말하는 붓카. 바람도, 구름도, 모든 게 전혀 다르다는 그들은 득도(得道)를 한 듯 보인다. 오히려 느릴지언정 천천히 걷기 때문에 자신을 온전히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한다. 느림은 오히려 충만한 행복과 자부심을 준다니 분명 도인(道人)이다. 그들은 언젠가 닿을 목표지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딛는 한 걸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몸으로 말하고 있다.

나는 빠르게 달리다가 단속카메라 앞에서만 잠시 속도를 줄이는 캥거루 운전자다. 과속방지턱을 보지 못해 차가 심하게 요동을 치고 몸에도 충격이 오기 일쑤다. 차의 제한속도는 인생의 속도를 생각하게 한다. 나는 몇 ㎣를 달리고 있을까.

“천천히 가면 돼요. 넘어지면 안 되니까 시간이 더 걸려도 괜찮아요” 이 대사가 뼈아프게 와 박힌다. “행복은 천천히 가도 괜찮다” 급히 달리려고만 했던 나에게 콕 와닿는 메시지다. 행복을 좇아 달려온 먼 거리. 빨리 도달하고 싶은 욕심이 어깨의 짐이 무거울수록 더 속력을 냈다.

행복은 삶의 속도에 반비례하고 밀도에 비례한다고 한다. 삶의 속도를 줄여야 각도가 넓어지고 행복의 밀도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동안 행복의 시선을 남에게 뺏기고 살았다. 다른 이들과 키재기 하느라 나는 없었다. 순간순간의 충만감이 쌓여 행복의 밀도가 촘촘해지는 법이건만 내 속도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퇴근길, 어린이보호구역을 지나고 있다. 계기판은 30㎣를 보여준다. 길가 옆 꽃집에 꽃들이 눈에 들어온다. 예쁘다. 저기에 꽃집이 있었는지 이제야 발견한다. 서행하니 보지 못했던 광경들이 보인다. 인생도 지금의 차의 속도만큼만 달려보면 어떨까. 비로소 내가 보이지 않을까. 그러면 놓치고 지나가는 풍경은 없으리라. 인생의 속도는 빠름이 정답이 아님을. 그게 행복의 속도는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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