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눈
겨울눈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2.01.11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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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눈처럼 하얗게 서리가 내렸다. 고요한 세상, 나무들도 생명이 끊어진 듯 눈을 감았다. 얼마 전까지도 수북이 쌓였던 앞집의 고춧대도, 옆집의 깻단도 멀끔하게 치워져 빈 밭이 휑하다. 빈집인 뒷집도 겨울이 되니 우썩우썩 나고 자라던 풀들이 푸석한 모습으로 잠들었다. 콩새와 직박구리가 산수유 열매를 두고 자리다툼을 벌이던 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겨울은 이렇게 모든 생명의 활동을 정지시켜 놓았다. 하지만 봄을 기다리는 소망까진 감추진 못하나 보다. 목련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른 나무들은 움도 보이지 않거나 가까이 가야 겨우 눈에 띌 정도로 겨울눈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목련은 눈보라에도 끄떡없는 솜털로 무장한 채 겨울눈을 통통하게 키워 멀리서도 눈에 띈다. 따뜻한 봄이 오면 언제라도 피어날 기세다. 목련이 피면 봄이라고 우리는 달력을 보지 않아도 안다.

계절을 모르고 시끄러운 건 사람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겨울이 오면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난리다. 지금은 코로나19로 갈 수 있는 여행지가 많지 않지만 코로나 이전에는 공항마다 북새통을 이루던 계절이다. 3년 전 나도 이때쯤 동유럽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동유럽은 우리나라와 날씨가 비슷해 여행 가방도 크고 무거웠다. 일주일이 넘는 일정이라 챙겨야 할 것도 많았다. 내가 일행의 총무인 것도 한몫했다. 세 부부의 여행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패키지여행이었는데 경유하는 나라가 6곳이나 되었다. 매일 짐을 풀고 싸야 하는 일정이 너무 힘들었다. 나라와 나라를 이동하다 보니 버스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여행 초반에는 모두가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는 설레어 들떴다. 하지만 여행 일정의 중반이 넘어서부터는 모두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휴게소에 멈춰진 차에서도 귀찮아 내리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좋건 나쁘건 경험은 중요하다. 여행 경비가 싼 탓에 무리한 여행을 선택한 이유도 있었지만 많은 나라를 포함한 상품에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 경험으로 많은 나라를 가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공부를 톡톡하게 한 셈이다. 한 나라를 가더라도 그 나라의 문화를 깊게 접하는 여행이 값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물론 일정이 넉넉하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언뜻언뜻 생각나는 장면들이 어느 나라였는지를 잘 모르겠다. 그래도 아직도 잊히지 않는 장면들이 있다. 파란 하늘에 떠 있던 하얀 양떼구름과 맑은 공기, 넓은 들녘에 쌓여 있던 빈 노적가리들, 캄캄한 밤, 달리던 버스 창밖으로 보이던 불빛들, 그것은 마치 반딧불이를 생각나게 했다. 우리나라의 농가는 늦은 시간까지 켜놓은 불빛과 가로등으로 인해 마을이 훤하다. 하지만 동유럽의 농가는 마을을 이루는 집보다는 외따로 있는 집들이 많았다. 한참을 달려야 어쩌다 나오는 희미한 불빛을 보고는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 깊은 밤이 아니었는데도 창밖이 깜깜했다. 동유럽의 하늘색과 공기가 왜 그렇게 맑고 깨끗한지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오늘도 방송에서는 미세먼지 수준이 나쁨이라며 야회활동을 자제하라고 한다. 열심히 사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조금은 걸음을 늦추고 고요를 즐기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싶다. 나무가 한 계절 눈을 감고 죽은 듯이 숨을 고르는 이유를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한다.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을 열심히 살아냈으니 한 계절은 쉬어도 된다고 덜 열심히 살아도 된다고 우리 자신에게 토닥여 보면 어떨까. 그리고 조용하고도 거룩한 시간을 만들어 보자.

동유럽 어느 외딴 집에서 떠듬떠듬 밝히던 불빛을 생각한다. 그리고 조용히 몸을 키우는 목련의 겨울눈을 본다. 숨 고르기다. 그것은 분명 내 안의 시간이 통통하게 살찌우는 시간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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