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가도와 일월오봉도
책가도와 일월오봉도
  • 티안 라폼므현대미술관 미디어아트작가
  • 승인 2022.01.05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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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산책
티안 라폼므현대미술관 미디어아트작가
티안 라폼므현대미술관 미디어아트작가

 

필자는 몇 해 전부터 우리 전통과 관련된 선조의 작품을 바탕으로 미디어아트 작업을 해오고 있다. 그중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와 `책가도(冊架圖)'는 필자의 대표적인 연작들 중의 하나다.

`일월오봉도'는 현재 1만원권 지폐의 배경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시아 문화권 어디에도 없는 조선왕조의 독창적인 그림으로 한 사람이 그린 그림이 아닌, 도화서 화원들과 당시 문인 및 임금이 머리 맞대 도안한 그림으로 필자는 이 그림이 조선의 최고 콜라보 작품이라 생각한다. 조선의 백두대간과 해와 달이 그려진 `일월오봉도'는 조선 왕의 어좌 뒤를 감싸고 있던 그림이라 왕을 상징했으며, 임금이 어좌에 앉는 순간 `일월오봉도'가 완성된다고 했다. 그만큼 `일월오봉도'는 조선 왕을 상징하는 중요한 그림이었다. 그런데도 정조는 1791년 이 그림을 치우고, 대신 책이 잔뜩 그려진 `책가도(冊架圖)'를 어좌 뒤에 두게 했다.

당시 정조 임금을 중심으로 궁중에서 시작하여 양반사회는 물론 민간에까지 `책가도 열풍'은 엄청난 유행을 넘어 한 장르의 그림이 사회 전체의 뜨거운 사랑을 받은 전무후무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여러 형태의 책가도 중에서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호피장막도(虎皮帳幕圖)'는 8폭 병풍으로 높이 128㎝에 폭 355㎝나 되어 웅장함이 느껴지는 책가도다. 그 멋짐에 필자는 몇 해 전 현대적 방식으로 폭 17m로 미디어아트 작업을 했다. 특히 `호피장막도'의 경우 기존의 책가도 형식과 다르게 전개되어 필자의 눈길을 끌었다. 범의 가죽이 휘장처럼 길게 드리워진 8폭 병풍의 가운데 장막을 살짝 들춰보니, 어느 명문 양반가의 방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이 작품은 궁중 화원이 제작하는 책가도의 기본형태와 민간에서 널리 유행하던 호피 문양을 병풍으로 제작하는 방법을 결합한 두 가지 양식의 융합형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호피장막 속에는 여러 가구를 배치하고 기물(器物)들이 자유롭게 놓여 있는 공간을 그려냈다. 책과 안경이 책상 위에 놓였고 주변엔 촛대, 향로, 공작 깃털 등 화려한 기물이 널려 있다. 청나라에서 들여온 골동품과 장신구, 도자 등 선비들의 생활이 연상되는 기물이 호피장막 안 공간의 주인공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암시하는 듯하다. 마치 독서 중이던 선비가 잠시 자리를 비운 순간을 사진으로 찍은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는 그림이다.

조선 시대 `책가도'를 주문하는 양반들은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현실의 모습을 자신의 공간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의도적으로 보여주고자 자신의 상상과 이상의 세계를 책가도라는 매개체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을 것이다. 지금으로 본다면 호피장막도가 새로운 메타버스로 가는 포털의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당시 조선 시대 말 신분제가 무너지는 혼돈 속에서 양반의 권위를 세우고 싶은 심정이 반영된 그림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책가도의 유행은 일반 백성에게 민화의 형태로 전해지며 장식성이 더 해지게 되고 호피도는 양반 집안을 장식하고 혼례용 꽃가마의 지붕을 덮거나 이불로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그리고 민화의 형태로 넘어간 책가도에는 과일과 꽃 등이 추가되며 조선 후기에는 서민에게까지 인기를 끌게 된다.

2022년 임인년(壬寅年) 검은 호랑이의 해를 맞아 미디어아트로 구현했던 기존 `호피장막도'를 다시 작업하기 위해 꺼내 들었다. 지금은 누구를 위한 호피장막도를 그려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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