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볶는 날
커피 볶는 날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2.01.04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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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새해 첫 휴일, 1월 1일이다. 평일이 아닌 주말이라 손해를 보는 느낌도 있지만, 다시 시작한다는 기운에 불씨가 댕기는 날이다. 동이 트기를 기다리다, 늘 그렇듯 현관문을 박차고 나간다. 오늘 사용할 장작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점심에 마실 커피를 볶고, 저녁에 먹을 훈제를 위한 땔감준비다. 커피 한 잔에 거실의 큰 창으로 드는 오후의 햇살에 멍 때리고,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불기운과 연기에 기름을 떨굴 훈제를 생각하니 이따위 추위야, 상기된 볼에 잠시 스치는 시원한 바람이다.

차콜스타터(캠핑도구·숯불 피우는 데 사용)에 들어갈 만큼의 길이로 장작을 자른다. 가장 밑단에는 불쏘시개를 깔고, 그 위에 장작을 넣고 불을 댕긴다. 회백색의 연기는 바로 솟구치는 불꽃에 밀려 사라진다. 낮게 부는 바람에 불꽃은 금세 정점에 이른다. 활활 타오르는 불의 기세에 넋을 놓는다. 눈의 초점을 잃고 불에 압도당한다. 얼마간 타던 장작의 기세가 꺾였다. 그리고 화로로 옮겨간다.

적당히 마른 나무라 불담이 좋다. 바람도 적당히 불어 재가 덮일, 화력이 사그라들 새가 없다. 준비된 수망(커피로스팅 전용팬)에 생두를 빈틈없이 깔고 화로 위에 올린다. 불기운이 좋아서인지 수분을 날릴 새도 없이 연녹색의 생두가 색을 달리한다. 화로 가까이 내려 팝핑 소리가 나면 위로 올린다. 화로에서 위아래로 거리를 달리하며, 앞뒤 좌우로 쉴새 없이 움직인다. 타닥타타닥, 티티딕 소리는 장작불 소리인지, 생두의 안쪽에서 터지는 소리인지 귀가 즐겁다. 체프(커피 껍질)가 날리고 생두가 볶아지는 색에 장작의 불이 변해감에 눈이 즐겁다. 그리고 장작불의 냄새와 원두 사이를 비집고 올라오는, 고소하게 퍼지는 커피 볶는 냄새에 코가 행복하다. 커피 로스팅의 마지막 단계, 쿨링은 겨울바람의 몫이다. 깔끔하고 완벽하다.

볼테르, 칸트는 각성하고자 커피와 와인으로 몽환에 젖었는데, 커피를 볶다 몽환에 빠졌다. 커피를 볶고 숙성의 시간은 뒤로 제쳐놓고, 바로 핸드밀로 갈아 커피를 내린다.

새해 첫날 갓 볶은 커피는 핸드드립이다. 평소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용할 때보다 좀 더 거칠게 간다. 갈리면서 올라오는 향이 넋을 잃게 한다. 드리퍼에 커피를 옮길 때, 가느다란 물줄기가 커피가루 위를 유유히 돌 때 향은, 수증기에 젖은 코끝에 매달리듯 하며 가슴 깊이 든다. 고소하고 단맛이다.

같은 생두지만 볶는 방식, 볶는 정도, 가는 정도, 숙성기간, 추출 방식에 따라 맛이 다르다. 봉투를 여는 순간, 커피를 갈 때의 향, 물이 갈린 원두 사이를 빠져나가면서 내는 향, 서버에서 드리퍼를 들 때 향, 커피잔에 넣는 순간이 다르다.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그윽하고도 미묘한 감성을 넘나든다. 깊은 맛을 원할 때는 거칠게 갈아 제즈베(커피를 끊이는 길고 좁은, 손잡이가 하나만 있는 냄비)에 넣고 끓인다. 부드럽게 마시고 싶을 때는 핸드드립을, 보통 때는 머신이다. 커피를 내릴 때 마실 때, 호흡이다. 호흡에 물이 내려가고 호흡에 향이 타고 든다. 그렇게 내린 커피는 깔끔하고 뒤에 단맛이 올라온다.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같은 생두지만, 로스팅 된 원두지만 다른 결과가 된다. 하나의 재료에 대하는 방식, 의도에 따라 너무나 많은 다양한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형태의 완전한 변화까지 살아 있는, 틀이 없는 개체다. 틀 속에 억지로 구겨 넣고 나오는 즉시 갈겨대는 상황은 눈을 씻고 볼래야 볼 수 없다.

새해 첫날 준비한 장작은 제 몸 다 태우고, 한 줌도 안 되는 재를 남겼다. 연기도 없이, 매캐한 냄새도 없이, 마지막 불씨가 사그라지면서까지 제 역할을 끝냈다. 커피를 볶는 내내 같이하면서,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불기운은 살아 있었다. 제 역할을 다한 한 줌 재는 겨울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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