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스러운 딸
나의 사랑스러운 딸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1.12.21 2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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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오매불망 기다리던 큰딸 아이가 집에 오는 날이다. 점점이 날리던 눈이 가로등 밑으로 눈발이 되어 희뜩거린다. 괴로움에 시달렸던 마음을 헤아린 듯 눈발마저 번잡하다. 마른 나뭇가지 흔들리듯 한마음에 갈피를 못 잡는 눈발이 더해진다.

쌓이지 않을 것 같던 눈발이었는데 소복소복 쌓였다. 여명에 선명하지 않은 새벽 눈은, 햇살이 건물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야 샛별이 된다. 그리고 서리가 봉곳하니 솟은 듯, 서릿발이 올린 흙에 내린 듯, 채 떨구지 못한 감 꼭지와 국화는 솜이 터진 목화밭이 되었다.

큰 딸아이가 좀처럼 잠에서 깨지 못했다. 언제나 잠에서 깰까? 기다리던 차에 찬바람은 잦아들었고 따스한 햇볕이 옷의 올 사이에 스며들었다. 소리 내지 않던 눈은 햇살을 받아 뽀드득 소리를 냈고 발자국이 남겨진 곳엔 물기가 고였다. 올라가서 깨울까? 깰 때까지 기다릴까? 갈팡질팡하는 사이 눈은 봄눈 내리듯 녹았다. 잠에서 깨면 보여주려 했던 주먹만 한 눈사람도 화분 안에서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저녁나절이 다 되어서도 깨지 않았다. 이젠 갈팡질팡하던 발걸음도 기력을 다 한 듯 한자리에 멈췄다. 멍하니 초점을 잃었다. 초점이 없는 눈에 희끄무레한 자국. 양지 바른 곳에 눈은 다 녹았는데 웬 눈 자국? 검은색 돌 표면에, 나뭇잎 다발에 무서리가 내린 듯, 돌에 점점이 꽃이 피었다. 한겨울을 앞두고 웬 꽃? 이끼도 아닌 것이 오래 묵은 듯 가무퇴퇴하다. 초록에 노란색에 흰색에 가무스름한 색을 더했다. 돌이 아니라 부식된 청동인 듯하다.

잘 다듬어지지 않은 주춧돌이다. 선대부터 있던 돌이었으니 나이도 제법 들었을 것이다. 묵묵히 한 자리를 지킨 터라, 새가 앉아 쉬었다 가며 똥을 찌익 발기고 갔을 터이고, 풀씨와 곰팡이 균도 날아와 찝쩍거렸을 터이다. 비바람과 눈보라에 쓸리고 할퀴면서도 오히려 부드러워졌다. 모진 시련을 받아들이고 안으로 삭혔다. 조급하거나 망령되지 않았다. 깊은 온기를 간직했던지 자그마하고 볼품없는 돌에 많은 꽃이 피었다. 뿌리도 꽃대도 꽃받침도 없는 꽃이라고는 부르지 않는 꽃이다.

저녁 느지막이 잠에서 깨었다. 온종일 굶고 잠만 잤으니 배가 고플 만도 한데, 밥숟가락이 힘없이 들린다. 그리고 눈물과 함께 터진 그간의 서운한 이야기,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등록금을 마련하고자 일을 했고, 대학원에 다니면서도 취직해 힘든 부모님께 누가 되지 않으려 했는데, 아빠의 한마디에 그간의 서운함이 주체할 수 없이 밀려오고 바람도 쐴 겸 타지에서 학교에 다녔다.

두 달여 남짓한 큰 딸아이의 집 밖 생활에 속은 검을 대로 검게 탔다. 비열한 횡포에 고통스럽지만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되어준 훌쩍 자란 어른, “아버지! 아들 같은 딸이 될게요!”라고 응원해주던 딸에게 화를 냈으니, 속으로 삭이고 삭히며 내색 한 번 못했다.

즐겁지만 않은 삶, 슬프고 고통스럽지만, 견딜 수 있게 하는 관계가 있다.

새롭게 만나는 반짝이는 관계도 있고, 가족이라는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그 어떤 꽃이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 가족은 만고풍상을 겪고도 의연하게 피워내는 꽃이다. 눈이 녹으면서 물기를 받아들이며 활짝 피워낸 꽃이다. 이끼도 아닌 곰팡이와 조류가 공생하며 만들어낸 지의류는 주춧돌과 하나가 되었다. 부모는 화를 낼지언정 자식을 미워하지 않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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