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낭성 태봉산 영조 대왕 태실터
청주 낭성 태봉산 영조 대왕 태실터
  • 정춘택 충북도문화재연 조사연구팀장
  • 승인 2021.12.12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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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 땅과 사람들
정 춘 택  충북도문화재硏 조사연구2팀장
정 춘 택 충북도문화재硏 조사연구2팀장

조선시대 일반 백성은 아이가 태어나면 탯줄을 잘라 땔감 속에 넣어 마당에서 태우거나 산에다 묻었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임시로 `태실도감'을 설치하였다. 궁궐 안에 임시로 탯줄을 보관하고 사흘 뒤 탯줄을 물로 백 번 씻은 후에 흰 항아리 바닥에 동전 한 닢을 깔고, 그 위에다 탯줄을 올려놓았다. 남색 비단으로 항아리를 덮어서 빨간 끈으로 동여매어 마무리를 한 후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찾아낸 명당자리에다 태실을 만들어 보관했다. 이렇게 하면 탯줄의 주인인 아기가 좋은 기운을 받아 장수한다고 믿었다.

조선 후기 소위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영조 대왕의 태 또한 영조의 즉위 이후 그 위용을 갖추기 위해 1등 태봉인 충청도 청주목 산내일동면 무쌍리, 즉 지금의 무성리 태봉산 묘좌유향이 낙점되어 1695년 9월 28일 진시에 안태되었다. 이것을 소위 가봉(加封)이라고 하는데, 중앙의 대석 위에 구형의 중동석과 옥개석을 얹어 태실을 만들고 주위에 상석을 깔아 호석난간을 둘러 완성하는 것이 보통인데, 마침 청주에서 일어난 이인좌의 난과 거듭된 가뭄으로 완성되지 못하다가 즉위 5년에서야 가봉이 완성되었다.

이후 구한말까지 조선에서는 8명의 수호군을 두어 영조 태실을 관리하였다. 그러나 이후 1928년에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전국에 있는 태실을 관리하기가 어렵다는 구실로 태 항아리만 꺼내어 서울 창경원으로 옮기면서 태실을 파헤쳤다. 1932년에 부강 만석꾼으로 알려진 김학현은 좋은 터에 선친의 묘를 쓰면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믿어, 태봉산을 매입하였다. 이에 무성리 태봉말 주민들은 만석꾼 선친의 상여가 들어오는 날 힘을 모아 상여길을 막았다. 그러자 만석꾼은 건장한 장정 50여 명을 상여꾼으로 써서 태봉말로 들어왔다. 결국 영조대왕 태실 터가 있던 태봉산 정상 부근은 다시 크게 훼손되게 되었다.

이후 태실비는 마을 주민들이 마을로 옮겨 세웠고, 태실은 1982년 주변에 흩어져 있던 태실 부재를 수습해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무성리 산6-1에 복원하였으나, 본래의 위치가 아니며 미완성되어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이 없이 전해져오고 있다.

이에 청주시에서는 2020년 8월에 영조대왕 태실에 대한 정비 복원을 위해 태실의 원위치로 전해오는 태봉산 정상부 일대에 대한 문화재 시굴조사를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하여 실시하였다. 시굴조사 결과 정상부의 지형을 전체적으로 삭평하고 흙을 다져 정지하고, 그 가운데에 태실을 안치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이는 직경 4m 정도의 원형 수혈 흔적을 확인하였다.

한편 시굴조사 당시 영조 태실 추정지 아래 계곡에서는 당초 태실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반원형의 석조태함과 옥개석, 난간석 등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석재들은 정상부의 영조 태실이 훼손되면서 반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추후 영조 태실 추정지와 주변 계곡부 일원에 대한 정밀 발굴조사를 실시하면 영조 태실의 원형을 찾는데 일조할 것으로 기대되며, 이를 통해 후대에 훼손되어 원형을 잃어버린 영조 대왕 태실의 원형이 복원될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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