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년 전 한국 여성들의 외침
123년 전 한국 여성들의 외침
  • 연지민 기자
  • 승인 2021.09.0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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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연지민 부국장
연지민 부국장

 

`구습은 영영 버리고 각각 개명한 신식을 좇아 행할세 사사이 취서되어 일신우일신함은 영영한 소아라도 저마다 아는 바이어늘 어찌하여 우리 여인들은 일양 귀먹고 눈 어두운 병신 모양으로 구규(舊閨)만 지키고 있는지 모를 일이로다. 혹자 신체와 수족과 이목이 남녀가 다름이 있는가. 어찌하여 병신 모양 사나히의 벌어주는 것만 먹고 평생을 심규에 처하여 그 절제만 받으리오.'

1898년 9월 1일, 지금으로부터 123년 전에 발표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선언문인 여성통문이다. 고종 임금이 나라를 통치할 때 발표된 이 여성통문(여학교설시통문)은 여성도 교육받을 권리, 경제활동을 할 권리,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내용으로 된 선언문이다.

오랜 유교 사회에서 억압된 삶을 살아야 했던 이 땅의 여성들이 권리마저 인지하지 못하고, 부당함을 말하지도 못했던 시대임을 생각하면 파격적인 행보가 아닐 수 없다.

여성통문은 한국 근대사회에 큰 파장을 가져왔다. 여성통문이 발표되자, 당시 황성신문에는 `하도 놀랍고 신기한 일'이라는 기사와 함께 여성통문 전문을 게재해 충격적인 사회분위기를 전했다. 또한 독립신문 역시 그해 9월 9일 여권통문 전문을 소개하며 국가에 여성 교육비 편성을 요구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처럼 한국 근대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킨 선언문은 서울 북촌의 양반 여성들이 여학교 설립이 필요하다는 절실함에서 출발했다. 배움에 대한 여성들의 열망에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역할이 컸다. 1880~1890년대에 선교사들에 의해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등 여학교들이 연이어 세워지면서 여성의 인권에 대한 자각도 생겨났다.

여기에 강대국들의 외세 침략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대한제국 백성의 자주독립 의지가 역사의 그늘에 놓여 있던 여성의 삶에도 인권에 눈뜨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여학교 설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여성통문에는 일반인 여성 300여 명이 참여했으며, 통문의 대표 발의자는 이소사, 김소사로 적혀 있다. 이름을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기혼여성을 뜻하는 `소사(召史)'로만 기록한 여성들의 이 외침은 당대 획기적인 인권선언문임에도 한국의 가부장제도가 얼마나 엄격했는지를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여성통문이 발표되는 과정을 보면 여성 연대를 확실히 보여준 사례다. 우리 역사 속 여성 인물 중에는 여성의 권리를 모색하거나 기존 남성사회에 저항했던 인물도 있었다. 하지만, 단편적인 개인사를 벗어나 여성들의 연대로 이어가지는 못했다.(연대가 불가능했던 사회라는 말이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성들의 억압받는 현실을 고발한 여성통문이 당대 많은 여성과 개혁적인 남성들의 공감과 지지를 얻으며 사회적 힘을 받았다는 점은 이채롭다.

여성연대를 끌어낸 선언문은 선언에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사립여학교인 순성여학교를 설립하는 성과를 가져왔고, 교육받은 여성들이 다양한 전문직으로 진출하는 단초가 되었다. 그리고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3.1운동에 가담하고, 항일투쟁 및 항일운동에 당당히 여성의 이름으로 참여하며 책무도 마다하지 않았다. 남성과 비교해 그 활동이 미미했을지는 몰라도, 왕성한 여성운동은 해방 이후 선거 투표 및 정치참여와 같은 사회변혁에 가담할 수 있었다.

역사는 누군가의 변화에 대한 열망이 차곡차곡 쌓여 흘러가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 여성운동의 커다란 맥으로 분류되는 여성통문은 한동안 잊혔다가 2019년 법정기념일로 제정됐다. 올해는 2번째 법정기념일을 맞이해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졌지만, 여전히 일부 여성단체들의 기념 정도에 그쳐 아쉬움이 크다. 123년 전 간절했던 여성의 바람이 어떤 미래를 꿈꾸게 하는지 한 번쯤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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