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 떨어지는 나무
감 떨어지는 나무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1.08.17 19: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새벽, 저녁나절, 한여름 땀내에 찌들었던 땀구멍을 말끔하게 씻어줄 바람이 창으로 든다. 선선해진 바람은 무더기로 몰려 감나무 가지를 흔들어 놓고, 모처럼 높이 날려는 나비를 땅으로 내린다. 땅이라야 형형색색이 지천인 무더기꽃밭이다. 짓궂은 바람에 나비는 다 시들어가는 상사화에 몸을 의지한다. 왜 하필이면 시들어가는 꽃인지, 그렇게 향이 좋은 꽃도 아닌 듯한데.

감나무 아래 바람 길에는 많은 것이 바람을 맞는다. 수선화, 튤립, 목단으로 시작해, 함박꽃, 나리꽃, 수국, 그리고 상사화 군무다. 감나무 밑은 위험천만한 곳이다. 봄, 꽃 떨구기를 시작으로 감나무는 `감 떨어지는 일'을 아직 멈추지 못하고 있다. 마카로니 과자처럼 생긴 꽃이 떨어지고 얼마 안 돼 대추만 하더니 지금은 주먹만 한 감을 투하하고 있다. 대봉, 둥시, 단감나무 연대다. 무게도 제법 나가는 터라 바닥이 패이고 소리도 제법 크다. 그 위험천만한 곳에 자라는 녀석들은 불안할 만도 한데, 진한 녹색의 잎은 손바닥만 하게 튼실하게 자라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감이 떨어질 때마다 잎은 위아래로 움직인다. 그런 곳에 여리디 여린 상사화가 대를 올리고 꽃을 피워냈으니 내가 걱정이다. 그러나 걱정은 쓸데없는 걱정, 역시 `감 떨어지는 놈'이다. 적중률이 제로다. 무더기라 그 중 하나는 맞힐 만한데도 말이다.

최종에는 몇 개나 달 건지 아직도 감을 떨구는 감나무를 보면, 바닥에 떨어진 감을 줍는 수고로움이 짜증으로 바뀐다. 작을 때는 몰랐는데 주먹만 하게 커다란 감까지 떨구니, 이젠 남은 개수를 헤아릴 정도다. 그래도 아버지 제사상에 올린 정도는, 가족들 나눠줄 정도는 되겠지? 어쩌면 감나무가 양분이 부족해 감을 달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닐까? 저렇게 자꾸 떨구는 이유가 감나무 아래에 있는 것들에게 거름을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닌지. 이렇다저렇다 말이 없으니 `감 떨어지는 감나무'를 멍하니 쳐다볼 뿐이다.

어쩌면 예전엔 더 많은 감이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감나무 아래에 건사해야 할 녀석들이 자리하고 있으니, 내줘야 하나 제 몫 챙길 것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감꽃과 감을 떨구어 봄부터 피어나고 자라는 것들에게 거름을 주는 감나무다.

감나무는 커다란 나무가 되었고 이제 화려하기까지 하다. 클래마티스에게 길을 내주더니 감나무에 커다란 보라색 벨벳꽃이 피었다. 땅바닥은 새순에 내주어 초록의 융단으로 두툼하게 치장했다. `찌~익'똥 싸고 가는 소리만 요란한 직박구리에게도 가지 하나를 흔쾌히 내어 주었다.

감나무는 봄부터, 아니 어쩌면 겨울부터 어려움에 부닥쳤을 것이다. 한파에 가지가 얼 걱정, 순을 돋아내고는 벌레에 갉아 먹힐 걱정, 감을 달고는 깍지벌레에 둘러싸일 걱정, 여러모로 많은 걱정이 어려움으로 이어졌으리라. 그렇지만, 감내하고 그 아래 것들에게까지 건사하는 무성한 나무가 되었다. 매년 자람을 거듭할수록 더 큰 나무가 되면서 더 많은 것을 품는다.

위대한 땅은 말이 없듯 그 어떤 말이 없다. 이런저런 말이 없는 `감 떨어지는 나무'는 자기 자신의 자리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감 떨어지는'나무다. 자신의 자리 지키기가 아닌 함께하는 삶을 안다. 일보단 삶으로 알기에 구태여 소리 내어 말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가을 김장 준비를 위한 텃밭을 마련한다. 완숙된 퇴비를 펴고 갈아엎고 모종을 준비한다. 내년까지 먹거리를 채비하는 시기다. 새벽, 저녁나절 선선한 바람이 분다지만 아직 한낮의 노동에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 햇볕은 더 따갑다. 그 따가운 햇살을 기꺼이 막아주는 감나무 아래에 나도 털썩 한자리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