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이 모든 것에 앞서는 건 아니다
실존이 모든 것에 앞서는 건 아니다
  •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21.07.07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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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룡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읽기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교수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교수

 

인간 마음을 들여다보면 오만 가지 일들이 다 일어난다. 오만가지 생각 중 어느 하나도 꼭 일어나야 하는 건 없다.

기쁘다. 말보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성 이전에 몸이 반응한다. 슬프다. 누가 무슨 말로 위로를 해도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흐른다. 심지어는 콧물까지도 흐른다. 화가 난다. 너 일루 와 한 번 맞아 볼래? 지면이라 욕을 할 수는 없지만 욕을 섞어가면서 밖으로 폭발한다. 누가 아무리 점잖은 말로 타일러도 분노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극한 감정이 일어나면 이성의 통제력이 미치지 않는다. 감정은 밖으로 쏠리면서 이성의 역할을 사실적으로 제한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정서들은 이성을 통해 제어해야만 한다. 그래야 사회도 유지되고 개인의 삶도 살 만해진다.

이것들과는 종류가 다른 정서도 있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모친상을 치른 날 애인과 잠자리를 하고, 다음 날 햇빛이 눈이 부시다는 이유로 권총으로 사람을 쏘아죽인다. 여기서 “왜?”냐고 물으면 안 된다. 햇빛이 눈이 부셔서 사람을 쏘아죽일 때 드는 기분(mood)은 이성의 기능을 원초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된다. 모두의 삶을 책임졌던 그는 이제 하찮은 미물이 되어 존재조차가 성가신 벌레가 되어 사육당한다. 가정과 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살아가던 그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무기력함에 사로잡혀 지내다가 모두에게 버림받고 죽음으로써 해방감을 맛본다는 설정은 합리성을 뛰어넘는다.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mood)이 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기분이 들면 이성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우리 마음속에는 이런 느낌(mood)이 항상 일어난다. 조리 정연한 것에 대한 따분함, 권태, 불안, 공포 등이 그것들이다.

덥다. 모든 것이 늘어져 있는 느낌이다. 권태롭다. 샤워를 할까? 심드렁하다. 드라이브? 등산? 아이스크림? 어떤 걸 대입해도 일상적 삶에 생기가 돌아올 것 같지 않다. 이성적 계산을 통해 회복될 수 있을까? 어림없다. 세상의 의미를 다 삼켜버리는 이 기분은 조용히 다가와 우리의 일상적 삶의 뿌리를 뽑아 패대기를 친다. 일상적 삶의 의미를 다 삼켜버리는 이 기분(mood)은 어디서 오는 걸까? 모른다.

밑도 끝도 없이 불안하다. 왜 그러지? 이유 없다. 뭔 일이 생기려나? 알 수 없다. 어디에선가 스멀스멀 올라와 삶의 기반을 흔들어 놓고 사라질 기미도 보이지 않고 머물러 있다. 일상적 삶의 기반을 흔들어놓는 이 기분은 내가 원해서 가지게 된 것일까? 전혀 아니다. 어디에서 온 걸까? 모른다.

나를 들여다보려 하는데, 무서워진다. 다른 일을 찾는다. 안 해도 되는 청소를 한다든가, 샤워를 하거나 밀린 숙제를 한다. 그러면서 나는 안다. 이런 것들이 무언가를 피하기 위한 행동이란 것을. 두려움은 가장 원초적인 느낌이다. 이 두려움은 현재의 삶이 뿌리 뽑힐 수도 있기 때문에 생긴다. 내 삶의 현재 지평은 저 너머에 있는 영역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진다. 화롯불에 눈송이 녹듯, 짚불에 지푸라기 타버리듯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다. 내가 나의 이면을 보는데 두려운 건 이 때문이다.

실존주의자들은 슬그머니 들어와 일상적 삶의 뿌리를 뽑아 흔드는 이 기분(mood)을 실존적 체험이라고 부른다. 나의 존재감을 빼앗는 이 기분은 나(self)의 뿌리를 뽑아 교만함을 추방한다. 이것들도 내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오만가지 생각들 가운데 하나다. 이런 것들은 자아의 무근거함을 깨치게 해준다는 점에서는 긍정적 기능을 한다. 그럼에도 그건 생각이다. 모든 생각은 꼭 일어나야 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이런 기분들도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실존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건 아니다.

/충북대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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