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의 뿌리인 훈민정음은 인간 생체의 발성 원리에 기초해서 제작되었다. 어쩌다가 보니 자모음의 체계를 갖추게 된 다른 나라의 문자체계와 달리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의 지휘 하에 생체적인 질서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소리 나는 곳과 그곳의 모양에 따라서 자음이 만들어졌다. ㄱ은 어금니 쪽에서 나는 소리(牙音)이며 ㅅ은 이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는 모습이며 ㆁ은 목젖의 모습으로서 목에서 나는 소리이다.
자음은 형체만 생체의 모양을 갖추고 있지만 모음은 보다 심층적인 생체 질서를 반영한다. 훈민정음의 모음에서 가장 기본적인 음은 아래 아( • , 하늘), 으(ㅡ, 땅), 이(ㅣ, 사람)이다. 영어에서 기본 모음은 a, e, i, o, u이다. 이는 각기 ㅏ, ㅔ, ㅣ, ㅗ, ㅜ가 된다. 훈민정음에서 기본 모음은 • , ㅡ, ㅣ이다. 새종대왕의 시각에서 보면 영어의 기본 모음에서 i(ㅣ)를 제외하고는 사실 기본 모음이 아니다. 나머지 ㅏ는 ㅣ + •이고 ㅔ는 (• + ㅣ) + ㅣ, ㅗ는 • + ㅡ, ㅜ는 ㅡ + •가 된다. 사실 단모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ㅏ, ㅓ, ㅗ, ㅜ 등은 훈민정음의 모음체계에서는 복모음이 된다. 곧 보다 단순한 음이 결합해서 나타나는 2차적 모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3차 모음도 있다. ㅑ, ㅕ, ㅛ, ㅠ 등이 ㅏ, ㅓ, ㅗ, ㅜ에서 파생된 3차 모음이다. 이렇게 훈민정음의 모음체계는 발성기관의 성음 원리에 따라서 체계적인 질서를 갖추고 있다. 전세계 언어 중에서 이런 질서를 갖춘 언어는 훈민정음이 유일하다.
서양의 철학에는 사유경제의 원리라는 것이 있다. 적은 수의 원리를 갖고 설명할 수 있는 걸 많은 원리로 설명하지 말라는 원리로서 단순성의 원리라고도 한다. 설명의 체계는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준에 맞춰보면 훈민정음은 모음체계에 있어서는 단순성의 원리를 가장 잘 지키고 있는 언어이다. •, ㅡ, ㅣ의 세 가지 모음을 갖고 인간이 낼 수 있는 모든 모음 소리를 다 만들어낼 수 있다.
모음 구성 방식을 설명하면서 알아본 것처럼 기본 3 모음 중에서 •는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곧 •가 없으면 ㅡ와 ㅣ를 제외한 나머지 모음을 구성할 수 없다. • 는 하늘의 소리로서 모든 모음의 근원 역할을 한다. 아이들이 가장 먼저 발음하는 엄마는 사실은 ᄋᆞᆷᄆᆞ이다. • 를 아이들이 가장 먼저 발음하는 건 발음하기 가장 편하기 때문이며, 이는 • 음이 가장 자연스러운 원초적인 음이라는 걸 의미한다. • 가 원초적이기 때문에 ㅡ와 ㅣ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모음을 만들어낼 때 반드시 • 가 포함되어야 한다. 세종대왕은 편경 제작의 일화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절대음감을 갖고 있었다. 세종대왕은 인간이 소리를 낼 때 •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걸 알고 이를 토대로 문자를 만들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에서 •는 어디로 갔을까? 모른다. 없어졌다는 건 확실하다. 모음 구성에서 가장 기본적이며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근본 문자가 사라지고 그에 따라서 음가를 알 수 없다. 통탄할 노릇이다. 언제 없어졌을까? 일제 강점기 한글학자들이 발표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부터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이 때 참여한 학자들이 해방 이후 국어학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지금은 이 학자들의 후예가 대학에서 연구를 담당하고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다. 전문학자들이 훈민정음의 기본 가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채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훈민정음의 특장점을 없앤 한글을 사용하고 있는 후손들을 보면서 세종대왕은 뭐라고 할까? 옥을 만들어줬더니 막돌을 만들어 쓰고 있다고 혀를 차지 않을까? 보는 눈이 없으니 조상이 만들어준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게 이 한 가지 뿐일까? 조상만한 후손이 없다는 게 우리의 비극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