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북문로 통일신라시대 집터 유적에 숨겨진 비밀
청주 북문로 통일신라시대 집터 유적에 숨겨진 비밀
  • 정춘택 충북도문화재硏 조사연구2팀장
  • 승인 2021.02.14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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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정춘택 충북도문화재硏 조사연구2팀장
정춘택 충북도문화재硏 조사연구2팀장

 

통일신라시대에 청주는 7세기 후반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이 설치되었고 이후 8세기 중반에 서원경(西原京)으로 바뀌게 된다. 서원소경과 서원경의 장소 비정에 대한 문제는 아직 이견이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통일신라시대에 청주는 서원소경과 서원경이 설치된 국가적 요충지였다는 점이다. 한편 이와 관련된 고고학적 유적은 그 동안 성곽 위주로 보고된 편이였지만 최근 들어 생활유적들이 청주지역 곳곳에서 발굴조사 되어 보고되고 있다.

지난 2016년 11월부터 2017년 1월까지 발굴조사한 청주 북문로 Hutis아파트 조성부지 내 유적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와 우물 등 생활유구(生活遺構)가 확인된 바 있다. 이 가운데 조사지역 동쪽 귀퉁이에서 확인된 구들시설을 갖춘 방형(方形)의 집터에서는 통일신라시대 토기편, 기와편들과 함께 `흑색양이부직구호(黑色兩耳附直口壺)'가 출토되었다. 그런데 이 흑색양이부직구호(양쪽에 손잡이가 있고 아가리가 곧게 세워진 항아리)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만 보기에는 무언가 특별한 점이 확인된다. 바로 이 항아리의 색이 흑색에 가까운 점, 항아리의 생김새가 고구려 유적인 경기도 구리 시루봉 보루에서 나온 항아리와 비슷한 점 등 다른 통일신라시대 토기들과는 다른 점이 확인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유적의 다른 주거지에서 출토된 토기에는 `井'자, `十'자 형태의 기하문(幾何紋)이 새겨져 있었다. 이러한 문양은 신라의 토기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지만, 역시 고구려 유적인 서울 구의동 유적과 서울 아차산 4보루에서 나온 토기의 문양과는 매우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이 토기들은 고구려 계통의 토기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유물들의 형태와 특징 등을 볼 때 그 시기는 서원소경이 청주 지역에 설치된 시기와 맞물리는 대략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후반대로 판단된다.

통일신라시대 서원소경이 설치된 시기의 청주 시내에서 왜 고구려 계통의 유물이 출토되었을까?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 부흥 운동 기록과 고구려 유민들의 사민(徙民)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에서는 서원소경이 설치되기 1년 전에 보덕국(報德國)이란 나라를 토벌한다. 이 보덕국은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백제의 옛 수도인 전라도 익산에 설치한 일종의 신라 속국인 셈인데 보덕국의 고구려 유민들은 나라를 잃었다는데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고구려 부흥 운동을 하였다. 이에 신라에서는 보덕국민들을 탄압하고, 고구려 유민들을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 이주시켰다 한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유민들을 남원소경(南原小京)으로 사민한 기록이 쓰여 있다. 이러한 점들을 들어 학계에서는 고구려 유민들을 서원소경으로도 사민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상태이다. 또한 토기의 시기가 고구려 유민들을 서원소경으로 사민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후반대로 보여서 이러한 추론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따라서 청주 북문로 Hutis아파트 조성부지 내 통일신라 집터 유적에서 출토된 고구려 계통의 토기들은 서원소경이 설치되면서 사민된 고구려 유민들이 일부 사용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 유민들은 비록 나라를 잃었고 당장 처한 현실도 힘들었을 테지만 그들이 사용한 토기에 고구려 계통의 문양을 남기고 토기의 형태도 고구려 계통으로 만드는 등 고구려의 문화적 전통을 지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노력이 토기에 남았고 이렇게 후대에 발굴조사되어 청주지역 통일신라시대 역사의 다양성을 알려주는 자료가 되고 또 특별한 의미를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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