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형제가 함께 활약한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부자와 형제가 함께 활약한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 승인 2020.08.24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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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아버지 곽준희, 독립운동가 아들 중규·중선 형제를 기리며
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곽중규(郭重奎·1891~1950)는 1891년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의병 출신인 아버지 곽준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선생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곽헌, 곽공원 등 다른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부친인 곽준희 선생은 1907년 정미의병 때 충북과 전북 지역에서 활약했던 장운식 의병부대의 일원으로 대일항전을 전개했다. 주로 군수품 수합 임무를 맡아 활동하던 중 1909년 3월 일경에 체포되어 같은 해 10년간 옥고를 치른 인물이다.

의병 활동을 하였던 부친을 통해 민족의식과 자주독립의 뜻을 키웠던 곽중규 선생은 1901년경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1909년 미국인 선교사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같은 해 서울로 올라가 만국성서연구회에서 성서보급을 위한 업무에 종사하면서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1916년 고향 옥천으로 내려왔고 인근 영동에 대서소를 개업하여 동포들을 도와주는 한편 식민지 지배 체제에 대한 자주독립의 의지를 불태웠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옥천군 이원면에서 동생 곽중선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대전형무소에서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옥고를 치르고 난 후 선생은 1921년 9월 미국인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려 했다. 미국으로 가던 중 문제가 생겨 목적지를 바꿔 중국 상하이로 가서 사진관을 개업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22년 3월에 임시정부 비서로 취임하고, 이어서 비서장으로 활동했다. 1924년 5월 상하이교민회에서 설립한 인성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교포 자녀의 민족교육에도 헌신하였다. 1925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제13회 의정원 회의에서 나창헌·최석순·강창제 등과 함께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탄핵안을 제출했다. 탄핵안은 3월 18일 가결되고 이를 다시 심판에 부친 결과 이승만 대통령의 면직을 결정했다. 3월 23일 회의에서 이를 발표하는 동시에 후임 대통령선거를 행하였다. 이 선거에서는 국무총리였던 박은식이 만장일치로 제2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 일로 인해 곽중선 선생은 광복 후에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쓸쓸하게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또한 임시정부의 외곽단체인 병인의용대에서 활동하던 동생인 곽중선(郭重善·1907~1935)으로 하여금 윤봉길에게 상하이의 지리와 풍습을 알려주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 의거가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밀정의 신고로 선생이 체포돼 신의주로 압송되어 2년 6개월 옥고를 치렀다. 1935년 5월 임시출옥해 톈진에 있는 동생 곽중혁의 집에 머물던 중 동생 곽중선이 괴한의 총격으로 사거했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다. 동생의 죽음에도 일제의 삼엄한 감시로 가지 못하고 1938년 스좌장(石家莊)으로 이주해 계속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1945년 조국광복 이후 소식이 두절되었고 후손들에 의하여 1950년 9월 10일자로 사망신고 처리되었다.

옥천군 옥천읍 마암리에 있는 `독립유공자탑'에는 곽중규 선생을 중심으로 부친 곽준희와 동생인 중규의 이름이 함께 새겨져 있다. 정부는 곽중규 선생에게 199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부친 곽준희선생은 애국장에, 동생 곽중선 선생은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부자 독립운동가, 형제 독립운동가 곽중선 선생 집안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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