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섬기는 진정한 지식인 최명길 선생 묘소에서
백성을 섬기는 진정한 지식인 최명길 선생 묘소에서
  •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 승인 2020.07.1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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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지천 최명길 선생은 몇 해 전 남한산성이라는 영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새롭게 주목받은 인물이다. 8세 때 “오늘은 증자가 되고 내일은 안자가 되며, 또 그다음 날엔 공자가 되리라.”라고 맹세해 부모를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백사 이항복 선생의 제자로 20세 때(1605년 선조38) 한 해에 과거시험 사마시의 생원과, 진사과, 그리고 대과인 문과까지 급제하여 3관왕을 한 인물이다. 과거 급제 후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에 들어가며 승승장구하는 듯했으나 광해군의 정책에 반대하였다가 병조좌랑에서 파직되어 경기도 지천으로 유배되었다. 얼마 후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으로 이조참판으로 승진하였으며, 정사공신 1등 완성부원군에 녹훈되었다.

최명길 선생은 문관임에도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홀로 임진강을 건너 적진으로 들어가 원수 장만을 찾아갔고, 계책을 세워 안현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이괄의 난을 진압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1636년에는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조판서에 다시 올라 병자호란에서 청과의 강화를 주도적으로 추진한 인물이다.

선생의 진면목은 병자호란 때 잘 나타난다. 전쟁이 발발하자 목숨을 걸고 청나라 장수에게 조선 침략의 부당함을 강력하게 항의함으로써 인조와 조정의 신하들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시간을 확보하였다. 선생은 “싸우자니 힘이 부치고 감히 화의하자고 못 하다가 하루아침에 성이 무너지고 위아래가 어육이 되면 종사를 어디에 보존하겠느냐”는 입장에서 강화(주화론)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쓴 항복문서를 찢는 척화파 김상헌에게 “항복문서를 찢는 사람도 있고, 그 항복문서를 다시 붙이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을 폄하하고 반대하는 상대방의 의견마저도 존중한 인물이다.

병자호란 후에도 영의정으로 대청, 대명외교의 복잡한 문제와 개혁을 추진하면서 패전국으로서 온갖 어려움을 당당한 자세로 해결한 정치인이자 외교관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승려 독보를 명나라에 보내 비공식적 외교관계를 유지한 일이 발각되어 1643년에 청나라에 끌려가 투옥되었다가 2년 후 소현세자와 함께 풀려나는 곡절을 경험하였다.

청주와 충주를 잇는 충청대로를 따라 증평방면으로 가다 보면 북이면을 지난다. 이곳 대율리에 진정으로 백성을 섬긴 최명길(1586~1647) 선생의 묘가 있다. 비교적 잘 조성된 널찍한 묘역에 3기의 봉분으로 되어 있는데, 중앙에 있는 봉분이 선생의 묘다. 묘는 높이 20cm의 화강암으로 둘레돌을 했고 망주석과 문인석이 갖추어져 있다. 상석과 적당한 크기의 묘표가 세워져 있는데 당대 명필인 남구만 선생이 글씨를 썼다. 묘 앞의 신도비는 숙종 때 세운 것으로 1984년 12월 31일에 충청북도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조선시대 할아버지와 손자가 모두 정승 반열에 오른 15가문을 명문가로 부른다. 그중에 으뜸 가문이 최명길 가문이다. 양명학과 수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던 학자로 영의정을 무려 8번이나 역임한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이 바로 그의 손자이다.

이번 주말에는 지천 최명길의 묘소를 답사해야겠다. 선생은 백성과 국가만을 위한 다양한 개혁들을 추진하였으나 성리학적 명분을 중시하던 시대 분위기와 당리당략 때문에 오히려 소인배로 폄하되기도 하였던 선생을 만나러 말이다. 시대를 뛰어넘어 백성의 삶과 국가의 존립을 위해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하고 최선을 다했던 진정한 지식인의 지혜를 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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