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청풍도호부의 관문 ‘제천 청풍 팔영루(堤川 淸風 八詠樓)’
옛 청풍도호부의 관문 ‘제천 청풍 팔영루(堤川 淸風 八詠樓)’
  • 김형래 강동대 교수
  • 승인 2020.07.05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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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제천 청풍 팔영루 전경
제천 청풍 팔영루 전경

 

충청북도를 흔히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이라고 하는데 그때의 `청풍'이 바로 청풍면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만큼 청풍은 아름답고 긍지 높은 곳으로서 조선시대까지 제천지역의 중심지였다. 남한강 줄기를 낀 살기 좋은 곳이었던 만큼 오래전부터 사람살이가 시작되어 곳곳에 선사시대의 집자리 유적과 고인돌,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고분군들이 흩어져 있었다. 고구려 때는 사열이현(沙熱伊縣)이라 불렸고 신라 경덕왕 때부터 청풍이라 불렸다. 조선 현종 때는 명성왕후 김씨의 관향이라 하여 충청도에서 유일하게 도호부로 승격되기도 했고 고종 때는 제천과 함께 군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철도가 개설되어 제천읍이 교통의 요지로 떠오르면서 이곳은 면이 되어 제천군에 편입되었다.

조선시대 청풍은 남한강을 이용한 수운교통의 중심지로서, 읍창(邑倉), 남창(南倉), 북창(北倉), 서창(西倉) 등의 창고가 있었다. 북창, 서창은 세곡을 중앙정부로 운송하기 전 임시 수납하던 외창(外倉)이었으며, 읍창, 남창은 고을의 조세를 수납하여 군자(軍資), 관내 경비와 진휼(賑恤) 용도로 운용하던 내창(內倉)이었다.

조선후기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읍창이 관문 밖에 위치했고 규모가 68칸으로 가장 컸다. 남창이 9칸, 북창이 30칸, 서창이 18칸으로 모두 합쳐도 읍창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니, 당시 청풍이 얼마나 번성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팔영루(八詠樓)는 옛 청풍부를 드나드는 관문이었는데, 지금은 청풍문화재단지의 출입문이 되었다. 수몰 전의 팔영루는 북진나루터에 인접해 있었는데, 장보러 오는 사람과 나루터를 드나드는 사람 등으로 북적였다고 한다. 이건(移建)된 팔영루는 자연석으로 육축을 쌓고 홍예를 틀어 만든 석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문루로 되어 있다.

`팔영루사적비'에 의하면 조선 숙종 28년(1702) 부사 이기홍(李箕洪, 1641~1708)이 창건하고 `남덕문(覽德門)'이라 하였다. `덕을 열람하는 문'이라는 자못 도덕적인 이름을 갖고 있었으나 고종 때 부사 민치상(閔致庠, 1825~1888)이 `청풍팔경(淸風八景)'을 읊은 시를 현판에 새겨 걸면서 팔영루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김형래 강동대 교수
김형래 강동대 교수

 

현재 정면 처마에는 `팔영루(八詠樓)', 배면 처마에는 `남덕문(覽德門)'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팔영루'의 현판은 민치상이 썼고, 팔영루 앞에 옮겨 세워져 있는 사적비는 고종 7년(1870) 부사 이직현(李稷鉉)이 중수 후 세웠다. 팔영루 내부 중도리에는 민치상이 읊은 팔영시가 걸려 있는데, 이를 통해 19세기 당시 청풍 지역의 아름다운 풍광을 알 수 있다.



淸湖眠鷺(청호면로) 맑은 호수에 백로가 졸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고

尾島落雁(미도락안) 섬 끝에 기러기 내리는 모습이 일경이라

巴江流水(파강류수) 유유히 흐르는 물에 파도가 장관이요

錦屛丹楓(금병단풍) 비단병풍을 두른 듯한 금병산 단풍이 절정이라

北津暮煙(북진모연) 북진나루에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것이 일품이요

霧林鐘聲(무림종성) 안개 숲 속에서 들려오는 새벽종소리가 좋고

中野牧笛(중야목적) 들 가운데서 목동들의 피리 소리가 유명하고

飛鳳落照(비봉낙조) 비봉산 해 떨어질 무렵 일몰이 장관이더라



청풍 팔영루는 비록 원래의 위치가 아니어서 아쉬움이 크지만, 옛 청풍도호부 관문으로서의 위용과 누각으로서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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