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고 배우는 일
가르치고 배우는 일
  •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 승인 2020.07.02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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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개가 멍멍 짖고, 쉰내가 풀풀 나는 뼈다귀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면서 침을 질질 흘리는 것은 과연 잘못된 일인가? 개를 보면서 왜 사람처럼 말도 못하고, 수표가 아닌 뼈다귀에 그렇게 정신을 빼앗기냐며 개를 훈계하고 가르치려는 사람들이 있다. 멍멍 짖고 쉰내 나는 뼈다귀에 꽂히는 개를 보면서, 그런 개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지적하며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은 과연 무엇에 꽂힌 것일까? 그리고 진정 개를 위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개를 지적하고 비난하듯, 자신의 기준에 따라 타인들을 지적하며 가르치려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지적하고 비난하는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다고 지적하고 비난하는 `나'도 종종 눈에 띈다. 누가 봐도 문제가 심각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줄 지혜가 없다면, 그가 받아들이지도 못할 지적과 비난 등은 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특히 자신의 언짢은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거나, 또는 자신이 많이 알고 정의롭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전혀 배우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을 지적하고 비난하는 짓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누군가 먼저 배우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 그런 연후에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려는 사람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의 눈높이에 맞춰 이끌어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제대로 가르치고 제대로 배우는 일이 가능해진다. 배우는 사람은 굳건한 믿음의 토대 위에서 온전히 자신을 낮추고, 가르치는 사람의 말을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 속에 녹여내야 한다.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친다는 아만심이 없는 가운데, 배우려는 사람 위에 군림함이 없어야 하고, 배우는 사람은 하심(下心)해서 일말의 의심조차 없는 겸허한 마음으로 가르치는 사람의 뜻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때,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하나로 회통(會通)될 수 있다.

줄탁동시(?啄同時)라는 말이 있다. 줄(?)은 달걀이 부화하려 할 때 알 속에서 나는 소리고, 탁(啄)은 어미 닭이 그 소리를 듣고 바로 껍질을 쪼아 깨뜨리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병아리가 알 속에서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는 소리를 내야만, 그 소리를 듣고 어미 닭이 비로소 부리로 껍질을 쪼아 알을 깸으로써, 새 생명이 탄생하게 된다는 말이 `줄탁동시'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갇혀 있는 알을 깨고, 좁아터진 우물을 벗어나는 기연의 필요조건은 배우려는 사람이 배우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고, 충분조건은 지혜로운 이가 배우려는 이의 간절한 눈빛을 읽고 그의 눈높이에 맞춰 제대로 된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다.

놀부가 자신의 이득을 위한 선행의 계기를 만들기 위해, 제비 다리를 부러뜨린 뒤에 치료해 주는 것은 제비를 위함이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에 휘둘리면서, 자신이 많이 알고 잘났다는 것을 드러내고 뽐내기 위해서 누군가를 가르치려 드는 모든 말과 행동은 어리석음의 극치일 뿐이다. 누군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가르침을 청한다고 해도, 모르면 모른다고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그리고 알면 아는 만큼 성심을 다해서 일러 주면 그뿐이다. 길을 묻지도 않았는데, 길 가는 이를 붙잡고 자신이 길을 잘 안다는 사실을 뽐내며 묻지도 않은 길을 일러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알 속에서 병아리가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부리로 알을 쪼아서 어린 새끼를 해친다면 어찌 어미 닭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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