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수로 내린 꽃비
억수로 내린 꽃비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1팀장
  • 승인 2020.06.3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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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1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1팀장

 

갓 태어난 동물의 살색, 분홍빛을 가진 넝쿨은 여린 나약한 줄기, 그 줄기에 작지만, 연녹색의 잎을 달았다. 땅을 기고 밟히기를 반복하며 나무가 되고자 홀로서기를 시도한다. 하지만, 태생이 다르다. 홀로 서지 못할 자신을 알기에 담벼락을 의지한다. 뜨겁게 달궈진 거친 벽에 손을 대고 오르기를 반복하며 멈추지 않는다. 한숨의 멈춤 없이 전진이다. 거추장스럽다 뜯기기도 하고 잘리기도 했지만 멈추지 않는다. 뿌리째 뽑힐 위기도 있었지만, 근근이 자리를 지켰다.

어느 해는 폭염이 극에 달하고 벌레가 극성이었다. 몸을 갈기갈기 찢어 놓듯 하고 갉아먹기를 멈추지 않더니, 간신히 줄기만 남은 적도 있었다. 낙담했지만 물을 올리고 새순을 달았다. 새순은 곧 해를 맞이하고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몸집을 키웠다. 그러면서 줄기도 제법 굵어졌다. 그리고 가을이 되어 해와 가깝게 지낸 한 해를 기념하듯, 강렬한 붉은빛의 잎으로 변해있었다. 해에 감사하듯 해와 같은 색으로 치장한 것이다. 그러고도 도움을 준 담벼락에 햇살의 그늘을 부드럽게 전한다. 고달팠지만 그렇게 한 해의 감사한 마음을 표현한다. 여름의 뜨거웠던 일손을 놓고 쉴 준비를 하는 해를 따라 나무도 화려하게 치장한 잎을 떨구고 긴 잠에 든다.

긴 잠의 끝에 그 누구보다도 먼저 움직인다. 추위는 아직 미련을 못 버렸고 짓궂은 걸 알기에 움을 틔우기보단 뿌리를 더 깊게 내리고 물을 올린다. 잎을 떨구고 뿌리로 내려 깡마른 몸에 어느새 윤기가 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길이 멀어진 사이 쭈뼛쭈뼛 새순을 달았다.

그리고 이내 녹음을 자랑하듯 짙은 색을 갖는다. 겨우내 축적했던 양분이며 물기를 온통 잎으로 보낸 듯싶다. 그리고 손님을 맞는다. 방방곡곡에서 몰려드는 손님에 내가 같이할 틈은 없는 듯하다. 아니 아예 근접을 못하게 한다. 웅웅거리며 잔치가 무르익는 향연은 가히 장관이다. 같은 녹색의 꽃이지만, 회양목의 향은 달달하다 못해 코를 들이대는 무모함을 갖게 하지만, 이 녀석의 향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도꽃 향 정도일까? 진정으로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벌만이 최고의 손님이다.

손님을 초대하고 향연은 몇 날 며칠을 이어간다. 저녁나절 귀가했던 손님은 다음날 아침이면 여지없이 찾는다. 그리고 차려진 음식을 열광하며 즐긴다. 이때가 나무에는 가장 즐거운 날인 듯싶다. 그리고 손님이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알이 열매를 단다. 맞은편 포도송이와 같은 자그마한 알맹이다. 여느 나무와 같이 비대하게 키우지 않고 단단하고도 단아하게 매무시한다. 그리고 열매를 익히며, 기고 오르기를 반복한다. 고단한 나날의 연속, 그렇게 세월은 흘렀다. 땅바닥에서 시작했는데 어느새 옥상의 바닥에서 햇살과 같이 할 날이 많아졌다. 옥상의 햇살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 되었다.

나무는 집의 형태를 가졌다. 오르지 못할 높다란, 기지 못할 긴 건물의 둘레를 에웠다. 또 어떤 상황에서 뜯기고 베어지고 제거될 수 있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해를 거듭하면서 더 많은 벌을 불러들이고 열매를 단다. 어느 나무와 같이 멋진 수형을 갖지도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돈이 될 만한 열매를 갖지는 못하는 나무다. 그래도 해를 거듭하면서 나름 멋진 연출을 하는 보잘것없는 재주는 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 꽃비도 억수같이 내렸다. 비는 내리며 흘렀고, 흔적은 물기를 머금은 촉촉함. 억수같이 쏟아진 꽃비는 수북이 쌓였다. 멀리 흩날리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우수수, 웅웅거렸을 강렬한 소리는 수북이 쌓인 꽃비에 애잔하게 스몄다. 그리 오래지 않았을 터인데 제법 불룩하다. 흐르지 않고 자리를 지킨 꽃비다. 색은 녹색이니 꽃비인지 잎인지 구분이 안 된다. 꽃비는 잎을 올린 등나무 아래에 쌓여 등걸과 함께 거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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