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살 것인가
어디서 살 것인가
  • 이영숙 시인
  • 승인 2020.06.18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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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이영숙 시인
이영숙 시인

 

하루가 다르게 도시가 자란다. 생명이 있다면 울트라 고속성장이다. 여전히 인류는 지금도 이 땅에 거대한 콘크리트 무덤을 쌓는 중이다. 그 미로 속 빼곡한 콘크리트 사이를 오가는 자동차 행렬과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 도심 속 콘크리트 높이를 키운 만큼 부레 없는 상어처럼 쉼 없이 지느러미를 움직여야 한다. 화려한 문명의 미끼를 입질한 만큼 치러야 할 대가이다.

정주하지 못하고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할 우리 삶의 현주소를 묻는다. 문명이라는 이름에 구속된 우리는 이미 오래전 영혼의 고향을 잃은 실향민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요즘 베이비부머 세대 가운데 전원주택을 옹호하는 사람도 많고 도심에서 가까운 곳에 농막을 만들어 5도 2농 생활을 하는 사람도 느는 추세이다.

월든 호숫가의 소로우처럼 오롯이 자연에 의탁하여 살아가는 순수 자연인도 많지만 도심과 자연을 오가며 반반 걸쳐 사는 반쪽 자연인도 많다. 우리나라에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 프로그램이 있다면 미국의 월든 호숫가엔 문명사회에 반대하며 숲속에 간단한 오두막을 짓고 2년여 동안 최소한의 비용으로 자급자족한 삶을 살았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있다.

문명을 따르지 않으니 구속받을 일 없던 그의 삶은 가난하지만 비교적 자유롭고 평화로웠다. 하버드대학이라는 명문 학도이면서 굳이 날품팔이 목수 일을 선택했던 소로우는 문명을 버린 만큼 잠시나마 자유 증서를 얻어 자기만의 독립된 삶을 추구했던 인물이다. 고용주가 되어 스트레스를 뒤집어쓰고 사는 것보다 자유롭게 노동을 팔며 자유를 선택할 수 있는 날품팔이를 가장 이상적인 직업으로 생각했던 그는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았다.

소로우처럼은 아니더라도 나 역시 3년 전부터 주말농장에 농막을 짓고 5도 2농의 삶을 사는 중이다. 원두막에 앉아 책을 읽고 평화롭게 앉아 글을 쓰리라던 파스텔 톤 꿈은 사라지고 틈틈 김매는 가운데 끊임없이 들어오는 지인들 때문에 책 한 장 넘기지 못하고 올 때가 다반사이다. 그래도 책보다 자연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온갖 꽃에 눈을 빼앗기는 이유가 더 클 것이다.

땀 흘리며 노동한 후 시원한 지하수 한 모금 들이키고 개울가 옆 바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노라면 푸른 들녘이 시야에 가득 들어와 박힌다. 입가엔 절로 공광규 시인의 <담장을 허물다>라는 시구가 흐른다. 나야말로 시적 화자처럼 이 넓은 들녘의 큰 영주가 된 기분이다.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 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텃밭 아래 사는 백 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 소리가 들어오고/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에서 듣던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중략> 공시 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나는 큰 고을의 영주가 되었다//-(공광규, 『담장을 허물다』 부분)



땀 흘려 노동한 만큼 주머니가 넉넉하지 않지만 하루 다르게 쑥쑥 올라오는 농작물에서 얻는 정서적 가치는 물질로 환산할 수 없다. 온통 짙푸른 들녘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이따금 고라니 내달려 놀라기도 하지만 문명 공간 보다는 대지 자연을 선택했기에 누릴 수 있는 자유 증서이다. 우리 삶의 평화로움의 랜드 마크는 자연이다. 녹음 우거진 곳에 들어서면 마음이 평온하다. 숲은 바라는 것 없는 그대로의 넉넉한 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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