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 시즌
살구 시즌
  •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 승인 2020.06.1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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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현장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살고 있는 아파트 뒷마당은 제법 너른 정원이다. 이 정원에는 여러 나무가 심겨 있는데 대부분은 울타리를 겸하도록 한 편백류이고, 사철나무나 목련 등 꽃나무도 일부 있다. 과실수도 있는데 고욤나무가 제법 훤칠하고, 5년 전쯤 옆집에 살던 분이 심은 대추나무와 사과나무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나무는 우리 집과 가장 가까이 심겨져 있어 가지가 집안까지 침범하려 드는 살구나무다.

살구나무는 중국이 자생지인 과실수다. 기원전에 아르메니아에 전파되어 널리 퍼졌다고 하는데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살구의 학명에는 아르메니아가 들어 있다. 살구나무 높이는 5m에 달하는데 꽃은 4월에 잎보다 먼저 피며 연한 분홍색으로 꽃자루가 거의 없이 지름이 3센티 정도로 핀다. 매화가 다 져버릴 즈음인 4월에 매화와 닮은 살구꽃을 보며 봄을 감상하는 기분은 더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살구의 하이라이트 시즌은 그때가 아니다.

우리 집 살구는(우리 아파트 살구라고 해야 하나 싶기는 하지만) 올해 기준 6월15일부터 최고의 시즌을 보내고 있다. 6월 초순 언제 익으려나 하고 초록의 어린 살구들을 내다볼 때, 마음마저 답답했다. 매일 크기도 모양도 그대로인 듯해서 말이다. 오락가락하던 빗속에서 작은 개복숭아만 하던 살구는 급격히 몸집을 불려갔고 지난 금요일 경에는 제법 알이 굵어졌다. 그리고 주말의 땡볕을 견디더니 월요일부터는 드디어 열매가 주홍빛 수줍은 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침 커튼을 열면 뒷마당은 주황색 몽돌 해변처럼 가득 살구가 펼쳐져 있는 것이다.

매일 수십 개씩 떨어지는 살구는 요즘 나의 가장 사랑하는 간식거리다. 수십 개를 주워도 벌레 먹은 데를 도려내고 나면 먹을 수 있는 것은 여남은 개에 불과해서 효율성 면에서는 아주 꽝이다. 하지만 익을 대로 익은 살구의 맛은 그 정도 수고에 충분한 보답이 된다.

살구나무의 살구(殺狗)는`개를 죽인다'는 뜻이라고 한다. 나무 이름치고 예쁜 편은 아니거니와 살벌하기까지 하다. 살구나무에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은 이 나무의 열매, 즉 행인(杏仁)에 독이 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살구 씨는 비누의 재료로도 유명하고 약재로도 쓰인다. 특히 옛날 중국에서 병을 고치는 의사를 행림, 즉 살구나무 숲이라 했다고 하니, 살구나무 씨앗의 효능은 이미 입증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선과 악의 존재방식에 대해 한 연구자는 선은 선이요 악은 악이며, 선과 악이 서로 반대가 되는 것 이상의 연결을 보여 주고 있다는 생각은 나오기 어렵다는 우리의 통념을 지적한다. 그는 선은 악 속에 악의 형식으로 있으며, 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악을 통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악을 통해 선으로 나아간다는 말이 어쩐지 희망의 메시지처럼 들렸다. 지금의 바르지 않은 모습으로 끝나버리는 삶이 아니라 그 바르지 못한 삶을 거울삼아, 계단 삼아, 좋은 삶으로 나아간다는 메시지 말이다. 살리고도 죽이는 살구, 상반될 것 같은 두 가지는 언제나 공존한다는 것을 살구를 통해서 한 번 더 배우게 된다.

참, 살구나무가 쓰이는 곳이 또 있다.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는 영롱한 목탁 소리를 떠올려 보라. 그 목탁 소리는 우리의 아둔함을 깨우는데, 살구나무 목재로 목탁을 만들면 그 어떤 나무로 만든 목탁소리보다 청아하고 맑다고 한다. 우리 집 뒷마당의 주황 살구들은 오늘도 내 마음을 두드리는 배움의 소리를 내며 툭툭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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