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넷뉴먼의 색면회화
바넷뉴먼의 색면회화
  • 이상애 미술평론가·미술학박사
  • 승인 2020.03.25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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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산책

 

`숭고(崇高/Sublime)'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는가? 그 어원부터 살펴보자.

`숭고'의 어원은 라틴어 Sublimus에서 나온 말로 접두사 Sub(밑·아래)과 문지방을 뜻하는 limen의 합성어로 무엇의 가장자리, 혹은 입구에 서서, 문지방을 넘어 어떤 광경을 목도함을 암시한다. 그 의미는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존재나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나 신, 혹은 자연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숭고란 초월적인 그래서 형이상학적인 실체 없는 그 무엇인 것이다.

우리가 숭고하다는 말을 쓸 때 우리의 마음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감각체험에서 비롯되는 비언어적인 울림을 이 두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숭고의 감정에서 핵심적인 것은 그 대상이 보여 질 수 없는 어떤 것, 혹은 재현될 수 없는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무(無)의 미(美)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근원적인 숭고미다. 무 앞에서 인간은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존재에의 경외심을 느낀다. 미국의 색면추상화가 바넷뉴먼은 바로 이 `무'로부터 비롯되는 감각체험을 통한 근원적인 숭고에 미메시스적으로 접근한 화가이다.

뉴먼의 회화는 벽면을 가득 채울 만큼의 거대한 크기의 캔버스에 화면을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zip'을 그 특징으로 하는 작가이다.

그의 캔버스에는 이 `zip'이라 부르는 수직선과 색체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두 개의 색면에 하나의 수직선을 그려 넣어 크기, 모양, 색채에 관계없이 모든 것은 두 개가 아닌 `하나'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체의 구성을 포기함으로써 뭔가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형상이 제거된 화면은 소멸되거나 중첩돼 실재의 공간 속에서 하나의 `사물'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뉴먼의 작품은 평범한 색면회화(color-field painting)와는 구별된다.

모노크롬의 색체로 가득 채워진 그의 캔버스는 색채 자체의 직접성과 자율성을 지닌다. 대상의 묘사가 없이 널따란 색면을 이용한다는 점에서는 색면 회화와 비슷하나, 그의 작품은 단순히 색의 탐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회화의 본질이라 여긴 어떤 주제(subject matter)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색면 자체의 절대적 대상화이자 객체화이다.

뉴먼의 캔버스 앞에 선 관람자는 일종의 무 앞에 서게 된다.

작품의 거대함으로 인해 관람자는 색채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무의 미(美)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근원적인 숭고미다. 무 앞에서 인간은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존재에의 경외심을 느낀다.

뉴먼에게 회화의 임무란 호렙산에서 불타오르는 나무를 바라보며 신을 벗어야 했던 모세의 체험을 매개하는 것이었다.

이상애 미술평론가·미술학박사
이상애 미술평론가·미술학박사

 

말하자면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 앞에서 단순한 공간(space)이 아닌 성스런 장소(place), 즉 마콤(makom:聖所)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의 회화는 침묵으로서, 그림으로 묘사할 수 없는 영역, 언어로 말할 수 없는 영역, 말하자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숭고'의 영역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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