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자! 살구나무
심자! 살구나무
  • 엄남희 두봉㈜농업회사법인 대표
  • 승인 2020.03.19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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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담 시골살이
엄남희 두봉㈜농업회사법인 대표
엄남희 두봉㈜농업회사법인 대표

 

시골 살이 3월은 하루하루 바쁘다. 주변의 묵은 잎들 싹 다 걷어 태우고 새싹 맞을 준비를 하게 되며, 호박 심을 구덩이엔 거름도 미리 넣어두어야 한다. 과일나무는 새순 돋기 전, 필요 없는 가지 잘라줘야 하고 감자 심을 밭도 일찌감치 갈아엎어 멀칭 해야 한다.

어릴 적 뛰어놀던 평창의 고향집에, 어른 혼자서는 팔 벌려 끌어안아도 모자랄 만큼 굵은 아름드리 살구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그 마을에서 가장 큰 살구나무였는데 학교에서 돌아오면 또래 아이들과 함께 그 나뭇가지마다 한 명씩 올라앉아 동네를 내려다보며 재잘재잘 떠들고 놀았다.

봄이면 초록색 지붕 위로 나무 한가득 하얗게 꽉 채운 살구꽃도 좋았지만, 열매도 달달하여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살구였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살구나무가 좋아서 올봄엔 꼭 한 그루 심고 싶다 했더니 엊그제 영실님이 좋은 품종 구했다며, 자두나무와 함께 살구나무 한 그루를 주고 갔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일이 손에 안 잡힌다. 뿌리 마르기 전에 오늘은 심어야 한다 생각하면서 마지못해 삽자루 챙겨들고 어디에다 심을지 둘러보며 몇 걸음 옮기다가 결국 내키지 않아 그냥 들어왔다.

삽질이 하기 싫다. 성큼 다가온 봄기운이 무색하게 오늘은 바람이 세차고, 거칠게 떨리는 온실하우스의 비닐 소리에 마음이 온통 어수선하다. 내가 누구인가? 내키지 않을 땐 삽자루 내던지고, 언제든 나갈 수 있는 그런 여인 아니었던가. 에라! 모르겠다. 오늘은 마침 장날이니 장 구경도 할 겸, 장터에서 국밥 한 그릇 먹고 고등어 한 마리 사올까 싶어서 집을 나섰는데, 도착하니 장터가 텅 비어 있다. 날짜를 착각했나 싶어서 재차 확인했지만, 오늘은 미원 장날 맞다. 이토록 시장거리가 텅 비었음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영향 때문이겠지.

미처 예상 못 한 이유로 괜한 헛걸음만 한 채 다시 들어왔다. 아침에 먹다 남은 딸기 몇 알 집어먹은 후, 소쿠리 하나 찾아들고 다시 나섰다. 사나이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 하고, 여인이 칼을 뽑았으면 고구마라도 깎아 먹으라 했다. 냉이라도 캐어야겠다는 생각에 농장 뒤편 빈 밭으로 향했다.

“달래, 냉이, 씀바귀, 나물 캐오자~ 종다리도 높이 떠 노래 부르네~”

제목도 시작도 모르겠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냉이를 찾고 있는데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뭐 하고 있느냐 묻는다. 냉이 캐러 나왔다 했더니 시골 생활이 부럽단다. 많이 캐서 택배로 보내달란다. 그러마! 흔쾌히 대답하고 본격적으로 고추밭에서 들깨밭으로 옮겨 다니며 열심히 눈알을 굴렸다. 달래, 냉이, 씀바귀…. 없다. 하나도 안 보인다. 냉이는 무슨, 개뿔. 가끔가다 개망초와 꽃다지만 뽈쏙 뽈쏙 튀어나와 있고 냉이는 닮은 것도 없었다. 어찌 이 동네는 냉이가 없을까. 저쪽 산 밑까지 한참 동안 왔다 갔다 했는데 결국 허탕이다. 춥다.

빈 소쿠리 팔꿈치에 끼고 터덜터덜 들어오는데 문득, 어린 시절 언니랑 냉이 캐러 갔던 날이 생각났다. 생 곶 너머 상리까지 갔었는데 언니 소쿠리엔 냉이와 달래, 고들빼기 한가득, 내 소쿠리엔 꽃밭에 심겠다며 캐어 담은 보랏빛 노루귀 꽃만 담겨 있었지. 그렇다. 그때부터였다. 왜 몰랐을까? 내 눈엔 냉이가 안 보인다는 것을.

어느새 오후 3시가 넘었다. 라면 하나 끓여 먹고 나무나 심자. 거칠게 바람맞고 왔더니 다시 삽질할 의욕이 생긴다. 그래! 조신하게 나물 캐는 여인보다 팔뚝 근육 자랑하며, 시커멓게 삽질하는 여인이 내겐 더 맞겠다. 심자! 살구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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