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의 추억
한여름 밤의 추억
  • 신찬인 전 충북도의회 사무처장
  • 승인 2020.03.19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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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신찬인 전 충북도의회 사무처장
신찬인 전 충북도의회 사무처장

 

지금은 대청호에 수몰된 청주문의면 소재지였던 문산리에서 할머님댁이 있는 산덕리까지는 십여 리 길이었다. 문산리에서 버스를 내려 논두렁길을 따라 걸으면 섶다리가 있는 개울이 있었고, 그 다리를 건너면 노루실이라는 자그마한 동네가 있었다.

다시 논두렁길을 따라 한참을 가면 붉은 함석지붕 위로 밤꽃이 하얗게 피던 외딴집이 있었고, 근처에는 커다란 방죽이 있었다. 거기서부터 가파른 산길을 반 마장 정도 걸으면 성황당고개였고, 그곳을 지나 오백 미터 정도 가면 할머님댁이 있는 윗산덕리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여름방학이 되어 혼자서 할머님댁에 가게 되었다. 돌다리 근처의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쉬다가 송사리 떼를 따라 나도 모르게 좀 더 아래로 내려갔었다. 그러다 버드나무에 가려져 있는 너럭바위를 발견했다. 바위는 몇 사람이 둘러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는데, 주변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고 무성한 나뭇잎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바위에 누워 하늘을 빼곡히 수놓으며 나는 빨갛고 까만 실잠자리를 하나 둘 세다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

얼마나 잤던지 잠에서 깼을 때는 주위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상여집이 보이며 더럭 겁이 났다. 서둘러 걷는데 시어머니 구박에 못 이겨 대들보에 목을 매 자살했다는 새댁 이야기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누가 따라오는 것 같고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것 같아 수시로 뒤를 돌아보며 정신없이 걸었다. 발바닥에서 땀이 나 고무신이 미끈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오니 날은 이미 컴컴해졌다. 그런데 저만치 빨간 함석지붕의 토담집이 보였다. 그리곤 문득 아이들 간을 빼먹는다는 문둥이 이야기가 떠올랐다.(어릴 때는 문둥병을 앓는 사람은 아이들 간을 먹는다고 했었다.) 전에 그곳을 지나칠 때는 그 집에 누가 사는지 관심조차 없었는데, 그날따라 왠지 그곳에는 문둥이가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소름이 돋쳤다. 그곳은 밤나무가 우거져 있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으슥한 곳이었다. 나는 문둥이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 가며 그곳을 통과했다. 겨우 방죽에 도착했을 때는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어휴 살았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방죽에서 헤엄치며 놀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아이들 이야기가 떠올랐다. 여름이면 방죽에서 놀던 아이들이 물귀신이 있다는 수문 근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일이 가끔 있었다. 저만치 수문이 컴컴한 동굴의 입구처럼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나는 가파른 산길을 정신없이 오르다 무언가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물귀신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정신을 차려 보니 그령(풀)을 묶어 놓은 것에 발이 끼어 있었다. 벌떡 일어나 뛰어서 성황당이 있는 고갯마루에 도착했다. 이곳은 동네 사람들이 장터에서 술 마시다 밤늦게 오다 보면 여우가 모래를 뿌리기도 하고, 여우에게 홀려 밤새도록 산속을 헤매기도 했단다. 은행나무에 감아 놓은 울긋불긋한 오색 천들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보고 나는 그만 혼절할 뻔했다. 그렇게 해서 겨우겨우 할머님댁에 도착한 나는 대문을 붙잡고 한참을 뒤돌아보았다. 그날 밤 나에게 세상은 온통 무서운 것뿐이었다.

세상일은 늘 생각하는 대로 보이고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진다. 코로나19 때문에 모두 불안에 떨고 있다. 지나친 두려움보다는 좀 더 조심하되 차분하게 위기에 대처해 보자. 이 또한 지나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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