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의 미학
가벼움의 미학
  • 전영순 문학평론가·칼럼니스트
  • 승인 2020.02.2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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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논단
전영순 문학평론가·칼럼니스트
전영순 문학평론가·칼럼니스트

 

까마득한 응애 소리 곰살갑게 다가오는 이월, 추락에도 격이 있다. 바람에 리듬을 타고 팽그르르 돌다가 사풋히 내린다. 눈目과 눈雪 한 번 마주한 적 없는 건조한 겨울, 승냥이가 떠난 길을 따라 그리운 눈꽃이 우수雨水에 나린다. 남해에 동백이 피었다는 소식도 푹푹 눈 내리는 마가리에서 전해오는 소식에 한량없이 묻히는 날이다. 겨울이면 한 번쯤 기대고 싶은 서정抒情,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가 메마른 가슴을 적신다. 천사도 요정도 아닌 것이 추락과 비상을 반복하며 건조한 대지에 착지한다. 어느 것 하나 상처 주지 않는 가벼움과 부드러움의 미학이다.

올겨울은 1908년 기상 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따뜻한 겨울이라고 한다. 이틀이나마 눈다운 눈을 봤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내 생전 이렇게 눈 구경 못 해 본 겨울도 처음이다. 2년 전 폭설과는 대조되는 해이다. 눈에 대한 감성도 나이를 따라 스며드는 깊이가 다르다. 가벼운 날갯짓으로 토끼처럼 날뛰고 싶었던 지난 시간과는 달리 올해는 눈이 아니더라고 비라도 왔으면 좋겠다. 중년의 가슴을 닮아 있는 퍼석한 대지를 적셔줄 비라도 펑펑 쏟아졌으면 좋겠다.

가슴보다 머리로 말하는 세상, 거리에 나서면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이 날이 갈수록 늘어난다. 요즘은 마스크를 쓰지 않고 다니면 이상할 정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세먼지에 코로나바이러스까지 흉흉하니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도 조심스럽다. 기침도 재채기도 맘 놓고 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주황 등이다. 마음 놓을 수 없는 바이러스는 의술에 의존한다손 치더라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은 미세먼지를 씻어 줄 비라도 쏟아지기를 기다려본다.

설야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도, 흰 당나귀가 다니는 산골에서 하얗게 노래하는 시인이 사라져서 그런지 미세먼지와 바이러스가 시인을 대신해 경종을 울린다. “하늘이시여 가난한 백성이 가슴 멘 하얀 입김으로 기후제라도 지내야 하오리까” 호흡마저 마음 놓고 할 수 없는 공간을 벗어나고자 산을 찾는다. 산마저 수평보다는 수직을 선호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틀간 내리던 눈이 멈춘 날, 깡충깡충 눈 구경 나갔던 벗이랑 산에 오른다. 먼 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스크를 썼다 벗었다 하며 숨 가쁘게 오르던 3일 전과는 사뭇 다르다. 아직 녹지 않은 눈을 뽀득뽀득 조심스레 밟으며 산뜻한 공기를 마신다. 발걸음도 머리도 마음도 가볍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를 노래하고 싶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소주를 마시다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흰 당나귀 타고/산골로 가자/출출이 우는 깊은/산골로 가/마가리에 살자//눈은 푹푹 나리고/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눈은 푹푹 내리고/아름다운 나타샤는/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흰 당나귀도/오늘 밤이 좋아서/응앙응앙 울 것이다///

상쾌한 공기와 투명한 햇살도 하루 반짝하고 말았다. 앞산도 뒷산도 뿌옇다. 신천지에서 전파된 뉴스는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만, 영혼마저 슬퍼서야 하겠는가. 비굴한 세상 따위 휘둘리지 않는다면, 한 번 왔다가는 인생 무엇이 두려우랴. 조금은 외따롭고 쓸쓸하더라도 사심없이 살다가 우리의 본향으로 가볍게 돌아갈 채비를 하자. 오늘도 헐떡거리며 산에 오르는 것은 살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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