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 하은아 진천교육도서관 사서
  • 승인 2020.02.17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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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가 말하는 행복한 책읽기
하은아 진천교육도서관 사서
하은아 진천교육도서관 사서

 

엄마가 일기를 쓰기 시작하셨다. 여든을 앞에 두고 매일 매일 일기를 쓰신다. 경로당에 간 이야기, 딸래미가 빵을 사들고 온 이야기 등 엄마의 일기는 평범하지만 유머가 가득하다. 내가 집에 가면 엄마는 일기를 꺼내 놓는다. 마치 숙제 검사를 받는 초등학생 아이처럼 맞춤법이 틀린 것이 없는지 이야기는 잘 구성되어 있는지 떨리는 눈으로 나에게 일기장을 내민다. 나는 웃지 않으려 노력하며 엄마의 일기를 찬찬히 본다.

맞춤법을 맞춰주면 엄마는 아빠를 원망의 눈으로 바라본다. 너희 아빠가 그리 가르쳐 줬다며 타박하신다. 옥신각신하시는 부모님을 보면 마음이 짠해지면서도 엄마 아빠처럼 나이를 들어가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도서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여든 앞에 글과 그림을 배운 순천 할머니들의 그림일기)'(권정자, 김덕례 외 3명· 남해의 봄날·2019)는 나의 엄마와 같은 할머니들의 이야기다. 동생 공부시키느라, 집안일 하느라, 오빠 뒷바라지하느라 글을 배우지 못한 할머니들이 뒤늦게 공부를 하며 쓴 그림일기다. 엄마의 마음 같아서 슬프기도 하지만, 이제 자신 있게 글씨를 쓰는 엄마가 자랑스럽다.

한 할머니는 6남매를 키우며 큰애는 야물고 똑똑해서, 아들은 착해서 둘째는 밝아서 잘 보듬어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자식들은 저마다 차별받았다고 엄마에게 말했다 한다. 그 마음이 서운하다며 일기를 그려냈다. 나도 종종 엄마가 오빠를 더 아껴 키웠다고 엄마에게 투정부리곤 했다. 엄마 마음도 그 할머니처럼 서운했을 것이다. 없는 살림에 깔끔하게 키운다고 시골에서 열심히 씻기고 초등학교 내내 필통검사를 하시던 엄마였는데 말이다.

할머니들의 밝은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도 밝아진다. 엄마의 고운 얼굴도 생각난다. 그 고운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 그동안 수줍게 사셨을 할머니들의 삶이 안타깝다. 이제야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다. 할머니들의 그림과 글 속에 뿌듯함이 묻어나 있다.

너무 당연하게 모든 것을 누리고 산 것 같다. 글을 아는 것도, 간단한 덧셈, 뺄셈을 하는 것도 엄마 뱃속에서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당연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의 불편함 따위는 고려하지 못했다. 엄마의 순탄치 않았던 70여 년의 삶이 고스란히 이 책에 그려져 있었다.

엄마의 한글 책을 봐주면서 나는 가끔 농담을 한다. “엄마! 나한테 만날 모르겠으면 몇 번을 읽으라며! 엄마도 몇 번을 읽어봐!” 엄마는 수줍게 대답한다. “그게 읽어도 잘 모르겠어!” 함께 웃어넘기지만 이제서 글을 자유롭게 읽고 쓰는 재미에 빠진 엄마가 귀엽기만 하다. 그리고 궁금하다. 엄마의 일기장에 어떤 내용이 쓰였는지 말이다. 언니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 어린 소녀가 된 듯 엄마의 일기장을 본다. 엄마의 일상이 그 어느 때보다도 다이나믹하게 느껴진다. 엄마는 오늘도 경로당 십 원짜리 화투에서 돈을 따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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