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하늘 저녁 눈
강 하늘 저녁 눈
  •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0.01.20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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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사람이 한평생을 살면서 느끼는 인생의 장면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경험과 생각이 다른 삶을 영위하기 때문에, 인생의 장면 또한 제각각일 것이다. 그러나 유한한 시간을 살 뿐인 인간으로서는 무한한 대자연의 모습에서 경외심을 갖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경외심은 거대함보다는 불변성에서 말미암는다. 사람은 늙고 병들고 변해 가는데, 자연은 늘 한결같다.

고려(高麗)의 시인 이인로(李仁老)는 겨울날 저녁에 어느 강가에서 하늘에 자욱이 내리는 눈을 보고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강 하늘 저녁 눈(江天暮雪)

雪意嬌多著水遲(설의교다저수지) : 눈은 오래도록 곱고 싶어 물에 닿기를 싫어하고
千林遠影已離離(천림원영이리리) : 온 숲에 먼 그림자가 어른대네
蓑翁未識天將暮(사옹미식천장모) : 도롱이 쓴 늙은이 날 저무는 줄도 모르고
醉道東風柳絮時(취도동풍유서시) : 취하여 말하길 봄바람에 버들 꽃 날리는 때라 하네

눈은 어디나 내려도 하얗고 고운 자태가 빛나지만, 유독 그렇지 않은 곳이 물이다. 물에 닿는 순간 눈은 녹아 버려 그 자태를 잃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강물 위에 내리는 눈은 운이 없다고 하겠다. 조금이라도 더 고운 자태를 뽐내고 싶기에 강물 위로 내리는 눈은 가급적 천천히 가려고 애쓴다. 사실은 바람에 흩날리는 것인데, 시인은 이를 눈이 물에 닿지 않으려 늑장 부리는 것이라 하였다.

물 위로 내리는 눈과는 반대로, 숲에 내리는 눈은, 그 자태를 오래도록 지킬 수 있으니,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눈을 소복이 뒤집어쓴 숲은, 마침 저녁인지라 그림자가 보일 듯 말 듯 어른거린다. 겨울 저녁 강가에 눈 내리는 모습은 자칫 밋밋할 수도 있었는데, 시인은 여기에 감칠맛을 더하는 묘수를 꺼내 들었다.

당(唐)의 시인 유종원(柳宗元)이 그의 시 강설(江雪)에서 도롱이를 쓴 채, 낚시하는 노인을 등장시킨 것을 생각한 것일까? 시인도 도롱이 쓴 노인을 등장시킨다. 다만 낚시하는 노인 대신 술에 취한 노인인 것이 다를 뿐이다. 낮술에 취한 노인은 날이 저무는 것도 모른 채, 눈발이 흩날리는 모습을 보고는 버들솜이 희뿌옇게 날리는 시절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인은 밋밋해지기 쉬운 겨울 장면 묘사에, 취한 노인을 등장시켜 역동성을 부여하고 있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생동감 있게 묘사하는 시인의 솜씨가 돋보이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 사는 것은 유한한 데 비해, 자연이 존재하는 것은 무한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 앞에 서면 인간사의 부질 없음을 절실히 느끼곤 한다. 이것이 인생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세속적 욕망에 지친 인간에 대한 위로로 작용할 때, 자연은 더 이상 경외의 대상만은 아닐 것이다.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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